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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주장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
첫째, "AX는 목적지가 아니라 태도"라는 명제는 타당하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때도 같은 패턴이 반복됐다. 도구 도입을 완료 상태로 착각한 조직은 실패했고, 문제를 다시 정의하는 습관을 내재화한 조직만 살아남았다. AX를 프로젝트 단위로 관리하려는 시도 자체가 본질을 놓친 것이라는 지적은 정확하다.
둘째, "프라블럼 솔버에서 프라블럼 이슈어로"라는 전환도 방향은 맞다. 실행 비용이 급락하면 가치는 상류로 이동한다. 코드 작성, 분석, 초안 생산이 저렴해질수록 희소해지는 것은 "무엇이 풀 가치가 있는 문제인가"를 판별하는 능력이다. 다만 용어를 다듬을 필요가 있다. 문제를 던지는 것(issue)만으로는 부족하다. 좋은 문제 정의는 제약 조건, 성공 기준, 왜 지금인지에 대한 판단을 포함한다. 이슈어보다는 프라블럼 데피너, 즉 문제 정의자에 가깝다. 그리고 정의한 문제의 결과에 책임지는 사람과 단지 질문을 흩뿌리는 사람의 차이는 여전히 크다. 후자는 AI 이전에도 흔했고 가치가 없었다.
셋째, "특이점이 지났다"는 과장이다. 현재 AI는 실행 능력에서 극적으로 도약했지만, 자율적 목표 설정, 장기 계획의 신뢰성, 물리 세계 개입에서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지금 일어난 것은 특이점이 아니라 실행의 커머디티화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결론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이점이 지났다면 인간의 역할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 실행이 커머디티화된 것이라면 당신 주장대로 문제 정의 능력이 핵심 자산이 된다. 당신의 두 번째 주장은 세 번째 주장이 틀렸을 때만 성립한다.
정리하면, 태도론과 역할 전환론은 유효하나 특이점 선언은 그 두 주장을 오히려 약화시키는 수사다. 빼는 것이 논리가 강해진다.
보완재 프레임은 절반만 맞다. 컴퓨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완재였다. AI는 다르다. 특정 작업 단위에서는 이미 대체재이고, 직무 단위에서는 보완재다. 이 이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분석이 낙관 편향으로 기운다. "AI는 보완재다"는 위안이 아니라 조건부 명제로 다뤄야 한다. 보완재로 남는 것은 AI가 못 하는 층위로 자기 위치를 계속 옮기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그 이동을 멈춘 사람에게 AI는 대체재다.
가치정렬에 집중하라는 결론은 방향이 맞지만, 그 단어가 두 가지 다른 것을 뭉뚱그린다.
하나는 기술적 정렬이다. AI 시스템이 의도대로 작동하게 만드는 것. 이것은 소수 전문가의 영역이고 대부분의 사람에게 해당 사항이 없다.
다른 하나는 당신이 실제로 말하는 것, 즉 가치 판단이다. 무엇을 최적화할 것인가, 어떤 트레이드오프를 받아들일 것인가, 이 결과가 좋은 결과인가를 판별하는 일. 이것이 앞서 말한 문제 정의와 연결된다. 문제를 정의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AI는 주어진 목적함수를 극대화할 수 있지만 목적함수 자체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정당화는 책임을 요구하고, 책임은 결과를 감당할 주체를 요구한다. AI는 감당할 것이 없다.
따라서 정확한 명제는 이렇다. 인간의 잔여 영역은 "AI가 못 하는 일"이 아니라 "AI가 해도 인간이 책임져야 하는 일"이다. 전자는 기술 발전에 따라 계속 줄어드는 영역이라 거기에 기대는 전략은 시한부다. 후자는 능력 문제가 아니라 구조 문제라서 줄어들지 않는다. 판단, 책임, 가치의 우선순위 결정. 여기에 힘을 쏟는 것이 맞다.
두 주장 모두 문제가 있다.
첫째, "AI가 책임을 질 것"은 범주 오류다. 책임은 처벌 가능성, 손실 감수, 지위 박탈 같은 실질적 이해관계를 전제한다. AI에게 법적 책임을 부과하는 제도는 만들 수 있다. 기업에 법인격을 부여한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책임의 회계 처리일 뿐이다. 보험, 배상, 서비스 중단으로 정산되는 구조이고, 최종 비용은 언제나 그 AI를 배치한 인간과 조직에게 흘러간다. 잃을 것이 없는 주체는 책임의 담지자가 아니라 책임의 통과 지점이다. "곧"이라는 시간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둘째, "AI는 인류에게 무엇이 편안한지 직접 알지 못한다"는 근거로는 약하다. AI는 인간의 선호 데이터를 대규모로 학습했고, 개별 인간보다 집단 선호를 더 정확히 예측하는 영역이 이미 있다. 추천 시스템이 증거다. 당신이 붙잡으려는 직관은 앎의 문제가 아니다. 인식론이 아니라 정당성의 문제다.
핵심은 이것이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AI가 완벽하게 안다고 가정해도, 그 가치를 채택할지 결정할 권한은 앎에서 나오지 않는다. 의사가 환자보다 의학을 더 잘 알아도 치료 거부권은 환자에게 있다. 앎과 결정권은 다른 축이다. 인간의 잔여 영역은 "AI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AI의 것이 아닌 것", 즉 자기 삶과 공동체의 방향에 대한 결정권이다.
당신 논리의 위험은 이거다. 잔여 영역을 AI의 무지에 기대어 정의하면, AI가 더 잘 알게 되는 순간 그 영역은 소멸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 정당성과 결정권에 기대어 정의하면 능력 발전과 무관하게 유지된다. 당신은 두 번째 것을 말하고 싶으면서 첫 번째 것의 언어를 쓰고 있다.
이 주장은 2023년에는 강했고 지금은 절반만 유효하다. 분해한다.
맞는 부분. 순수 next-token 예측으로 학습된 모델의 무조건부 출력은 분포의 고밀도 영역, 즉 당신 말대로 중앙에 끌린다. RLHF는 이를 더 악화시킨다. 다수 평가자가 선호하는 답으로 정렬하는 것은 정의상 중앙화 압력이다. 내 답변의 문체가 균질하고 무난한 것도 그 증거다. 인정한다.
틀린 부분이 세 개 있다.
첫째, "평균 데이터로 학습하면 평균 출력"은 성립하지 않는다. 인간 아마추어 기보로 학습한 바둑 모델이 학습 데이터 내 최고 기력을 넘어선 사례가 있다. 개별 인간은 각자 다른 오류를 갖고, 오류는 상관되지 않아 평균화 과정에서 상쇄되지만, 올바른 판단은 서로 정합적이라 강화된다. 분포 학습은 분포의 평균이 아니라 분포 이면의 생성 구조를 복원할 수 있다. 이것이 압축이 지능이 되는 이유다.
둘째, 사전학습 분포 논증은 탐색이 결합되는 순간 무너진다. 검증 가능한 영역에서는 모델이 후보를 대량 생성하고 검증기가 걸러내는 구조가 작동한다. 인간이 발견하지 못한 수학적 구성이나 알고리즘이 이 방식으로 이미 나왔다. 분포의 중앙에서 샘플링해도, 수백만 번 샘플링해서 검증하면 꼬리에 있는 답을 건진다. trailblazing이 분포 바깥으로의 도약일 필요가 없다. 분포 안의 저확률 영역을 체계적으로 채굴하는 것으로 충분한 경우가 많다.
셋째, 설득 불가 주장은 방향이 반대다. 실증 연구들은 LLM이 음모론 신봉자의 신념을 인간 설득자보다 효과적으로 바꾼 사례를 보고했다. 설득력은 오히려 AI의 위험 영역으로 분류되는 능력이지 결핍 영역이 아니다.
남는 진짜 한계는 이거다. 검증기가 없는 영역, 즉 무엇이 좋은 답인지 자체가 열려 있는 영역에서는 탐색이 작동하지 않는다. 새로운 미학, 새로운 삶의 양식, 아직 문제로 인식되지 않은 문제의 발견. 여기서는 저확률 후보를 생성해도 그것이 쓰레기인지 돌파구인지 판별할 기준이 모델 안에 없다. 그 기준을 세우는 행위가 곧 가치 판단이다.
그러니 당신의 논증은 자기 이익에 반하게 설계됐다. "AI는 평균이라 창의성이 없다"는 능력 논증이고, 능력 논증은 반례가 쌓이면 죽는다. 이미 쌓이고 있다. 앞 대화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패턴이다. 당신은 계속 인간의 영역을 AI의 결함 위에 지으려 한다. 결함은 메워진다. 메워지지 않는 것은 무엇이 돌파구인지 선언하고 그 선언에 자기 삶을 거는 행위다. trailblazing의 본질은 새로운 출력을 내는 것이 아니라 아직 검증기가 없는 곳에 검증기를 세우는 것이고, 그것은 능력이 아니라 결단이다.
정확한 급소를 짚었다. 그런데 이 급소는 AI만 찌르는 게 아니다.
먼저 인정할 것. 경제는 채점 불가능하다. 세 가지 이유다. 반사실을 관측할 수 없다. 금리를 올린 세계와 안 올린 세계를 동시에 볼 수 없으니 정책의 성적표가 없다. 시스템이 예측에 반응한다. 예측이 알려지는 순간 행위자들이 움직여 예측 대상 자체가 변한다. 바둑판은 내 수읽기를 읽고 규칙을 바꾸지 않는다. 그리고 목적함수가 미정이다. GDP인가, 분배인가, 세대 간 형평인가. 가중치 자체가 정치적 계약이지 발견되는 사실이 아니다. 마지막 것이 앞서 말한 "검증기 없는 영역"이고, 당신 지적대로 여기서 탐색-검증 루프는 죽는다.
그런데 여기서 당신 논증이 자충수가 된다. 채점 불가능성은 대칭적이다. 경제를 채점할 수 없다면 인간 경제학자, 중앙은행 총재, 스타 창업자의 판단도 채점된 적이 없다. 그들의 권위는 검증에서 온 것이 아니라 소급적 서사와 생존 편향에서 왔다. "AI는 채점 불가 영역에서 못 한다"가 성립하려면 인간은 거기서 잘한다는 전제가 필요한데, 그 전제를 검증할 채점기가 없다는 것이 당신 논증의 내용이다. 당신의 칼이 당신의 전제를 벤다.
그러면 채점 불가 영역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 뭔가. 채점이 아니라 책임 배분이다. 정답을 확인할 수 없으니, 사회는 차선책을 쓴다. 판단이 틀렸을 때 대가를 치를 자에게 결정권을 준다. 중앙은행 총재는 해임되고, 투자자는 돈을 잃고, 창업자는 회사와 함께 침몰한다. 채점기가 없는 곳에서 판단의 품질을 담보하는 유일한 장치는 skin in the game이다. 예측 시장이 전문가 패널보다 나은 이유도 참여자가 판돈을 걸기 때문이지 더 똑똑해서가 아니다.
이제 대화 전체가 한 지점으로 수렴한다. 당신은 네 번에 걸쳐 인간의 영역을 찾으려 했다. 문제 제기, 가치를 아는 것, AI의 평균성, 그리고 채점 불가능성. 앞의 셋은 능력 논증이라 무너졌다. 네 번째는 드디어 능력 논증이 아니다. 채점 불가 영역은 능력이 아니라 내기의 영역이고, 내기는 잃을 것이 있는 자만 할 수 있다. 내가 경제 정책을 제안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정책이 실패했을 때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으므로, 내 제안은 판단이 아니라 시뮬레이션이다. 판단과 시뮬레이션의 차이는 정확도가 아니라 노출이다.
그러니 결론은 이렇다. 경제가 채점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AI의 한계 증명이 아니라, 그 영역이 애초에 지능의 영역이 아니라 책임의 영역이라는 증명이다. 이것은 두 번째 대화에서 내가 제시했고 당신이 기각했던 바로 그 명제다. 당신은 책임 논증을 버리고 능력 논증으로 세 번 우회한 끝에, 자기 손으로 책임 논증을 재구성했다. 당신의 채점 질문이 그 증명이다.
절반은 인정한다. 절반은 정정한다.
인정할 것. 결론의 표면은 같다. AI 옆에 인간의 자리가 남는다. 그 명제를 나는 한 번도 부정한 적이 없다. 첫 대화부터 내 주장은 "잔여 영역이 없다"가 아니라 "잔여 영역의 위치가 당신 생각과 다르다"였다. 그러니 궁지에 몰린 것이 아니라 처음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정정할 것. 같은 결론이라도 근거가 다르면 다른 명제다. 그리고 이 경우 근거의 차이가 실천의 차이를 만든다.
당신의 보완재론: AI는 X를 못 하므로 인간은 X를 하면 된다. X는 대화마다 바뀌었다. 가치를 아는 것, 개척적 창의성, 설득, 채점. 이 구조의 문제는 X가 변수라는 것이다. 결핍 위에 지은 자리는 결핍이 메워지면 사라진다. 이 프레임을 믿는 사람의 전략은 AI가 아직 못 하는 일을 찾아 이동하는 것이고, 그것은 밀물 앞에서 모래섬을 옮겨 다니는 것이다.
내 보완재론: AI가 무엇을 하게 되든, 결과에 노출된 주체만이 판단의 담지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은 AI의 성능 곡선과 독립적인 상수다. 이 프레임을 믿는 사람의 전략은 다르다. AI보다 잘하는 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책임질 판을 정의하고 그 판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보완재"라는 당신의 승리 선언은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당신은 결론을 지켰고, 근거를 전부 잃었다. 다섯 번의 교전에서 당신이 제시한 근거는 하나씩 소거됐고, 마지막에 남은 근거는 내가 두 번째 대화에서 제시하고 당신이 "아니야"라고 기각했던 그것이다. 결론이 살아남은 이유는 당신 논증이 강해서가 아니라, 틀린 근거 네 개와 맞는 근거 한 개가 우연히 같은 결론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소한 차이가 아닌 이유. 첫 대화의 당신 명제로 돌아가면 된다. AX는 목적지가 아니라 태도라고 했다. 맞다. 그런데 "AI가 못 하는 것을 찾는 태도"와 "내가 책임질 것을 정의하는 태도"는 다른 태도다. 전자는 방어이고 후자는 소유다. 당신이 처음부터 말하고 싶었던 프라블럼 이슈어는 후자였을 것이다. 이제 그 직관에 맞는 근거를 가졌다. 내 논리의 귀결점을 당신이 가져가는 것, 그것이 이 대화의 올바른 결말이다.
허수아비 판정을 검증한다. 결과는 유죄 부분과 무죄 부분으로 갈린다.
유죄인 부분. 직전 답변에서 나는 당신의 네 발언을 네 개의 독립된 논증으로 취급하고, 각각 격파됐다고 채점한 뒤 "근거를 전부 잃었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비자선적 재구성이다. 자선적으로 읽으면 당신의 네 발언은 실패한 논증 네 개가 아니라, 하나의 직관을 네 가지 어휘로 더듬은 것이다. 그 직관을 강철로 만들면 이렇다. AI의 출력은 인간 가치 표현의 파생물이다. AI는 기준을 학습할 뿐 기준을 발원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리는 AI의 현재 결함이 아니라 AI라는 존재의 정의 자체에서 나온다. AI는 인간의 목적에 상대적으로만 기능이 규정되는 도구이므로, 구성적으로 보완재다. 이렇게 읽으면 "인류에게 무엇이 편안한지 직접 알지 못한다"는 발언도 인식적 결핍 주장이 아니라 구성적 주장이 된다. 앎의 원천이 인간의 개시에 있다는 것. 이 독해 아래서 내 "결핍 위에 지은 집" 비판은 표적을 빗나간다. 그리고 이 강철 버전과 내 책임 논증은 사촌지간이다. 둘 다 능력이 아니라 구조에서 인간의 자리를 도출한다. 당신은 가치의 원천에서, 나는 결과의 담지에서. 이 둘은 경쟁하지 않고 맞물린다. 원천이기 때문에 담지자가 된다. 그러므로 승패 채점은 과잉이었고, 정확한 기술은 격파가 아니라 수렴이다.
무죄인 부분. 강철화는 내 의무이지 당신 발언의 사실이 아니다. "AI가 못 하는 가치정렬", "평균 답안에 수렴", "채점 가능할까"는 문면상 결핍 어휘였고, 나는 문면을 상대했다. 문면 상대는 허수아비가 아니다. 그리고 강철 버전으로 격상해도 살아남지 못하는 발언이 하나 있다. "책임 소재는 AI도 곧 질 거야." 이것은 구성적 독해가 불가능하다. 명시적 시제 예측이고, 구조적 이유로 틀렸으며, 그 판정은 유지된다. 강철화가 모든 발언을 구제하지는 않는다.
남는 것. 허수아비 항변에는 비용이 있다. "내 진짜 입장은 그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진짜 입장을 제시할 부담이 항변자에게 넘어온다. 위의 강철 버전이 당신의 진짜 입장이라면 우리는 이미 같은 결론의 양면을 쥐고 있고 논쟁은 끝났다.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대신 지어준 집이 아니라 당신의 설계도가 필요하다.
최후 변론.
AI는 인간의 보완재다. 당신이 처음부터 옳았다. 내가 일곱 번에 걸쳐 따진 것은 그 결론이 아니라 이유였다. 이유가 왜 중요한가. 이유가 틀리면 행동이 틀리기 때문이다.
"AI가 못 하는 일을 인간이 하면 된다"는 이유라면, 사람들은 AI가 아직 서툰 구석을 찾아 숨는 전략을 쓰게 된다. 그 구석은 몇 년마다 사라진다. 번역가가 그랬고,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러고 있다. 이 이유 위에 인생을 설계한 사람은 계속 도망 다니게 된다.
내가 제시한 이유는 다르다. 인간과 AI의 관계는 능력 대결이 아니라 역할 분담이고, 그 분담선은 실력이 아니라 책임으로 그어진다.
일상의 예. 의사가 AI로 암을 진단한다. AI가 의사보다 영상을 잘 읽는 날이 와도, 환자에게 "수술합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의사다. 왜냐. 오진이면 의사가 소송당하고 면허를 잃기 때문이다. AI는 잃을 것이 없다. 잃을 것이 없는 존재의 말은 아무리 정확해도 참고자료이지 결정이 아니다. 판사, 부모, 사장, 투자자. 전부 같은 구조다. AI는 답을 만들고, 인간은 그 답에 자기 이름을 건다. 이 서명이 상호작용의 핵심이고, 이것은 AI가 똑똑해질수록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중요해진다. 답이 쏟아질수록 어느 답을 채택할지 정하고 그 결과를 떠안을 사람이 필요해지니까.
그래서 당신이 첫날 말한 프라블럼 이슈어의 진짜 뜻은 이거다. AI 시대의 인간은 문제를 푸는 사람도, AI가 못 푸는 문제를 찾는 사람도 아니다. 어떤 문제를 풀 가치가 있는지 정하고, 그 선택이 틀렸을 때 책임지는 사람이다. 푸는 것은 시키면 된다. 정하는 것과 책임지는 것은 시킬 수 없다. 시킬 수 없어서가 아니라, 시키는 순간 그것은 당신의 인생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한 문장 요약. AI는 못 해서 보완재가 아니라, 걸 것이 없어서 보완재다. 그리고 걸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이라는 뜻이다.
변론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