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외계행성 (16誠鉉)
2016년 당시 교내 천체 동아리 애플파이에 지원하며 제출한 단편 소설. 마션을 많이 오마주했다.
과제 본문: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자신이 미지의 외계행성에 있었습니다! 이곳에서의 모험담을 일기처럼 써주세요. (너무 과학적인 것에 연연하지 마세요. 개연성만 있다면 어느 정도의 비과학적 요소도 허용합니다!)
2016년 8월 20일 — 1일차
젠장. 깨어난 지 2시간이 되었다. 탈출선 일지를 작성 중이다.
기억을 다시 되짚어 보자.
나는 분명 애플파이라는 우주비행선을 타고 장거리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우주선에서의 파티를 즐기고, 비행선의 스위트룸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김세정이랑 명동 거리 데이트를 하는 꿈을 꾸고 있었단 말이다, 젠장. 이때가 2016년 2월이었다.
잠에서 깬 것은, 탈출선의 비상벨 소리를 듣고였다. "Oxygen Level Critical"이라고 징징대고 있었다. 산소호흡기…… 참 NASA는 일 처리가 항상 이런 식이다. 간단한 것을 항상 복잡하게 숨겨놓는다.
세계통일정부 법률상, 장거리, 그러니까 10AU 거리 이상의 노선을 비행하는 탑승자는 의무적으로 탈출선 운전 교육을 받아야 한다 (사실 내가 관련 OT 때 많이 졸았다). 탈출선에는 자동 항법 장치가 장착되어 가장 가까운 행성(또는 위성)으로 대피 항로를 설정하며, 탑승자를 수면 상태로 유지한다. 이 과정에서 강한 구조 신호를 보내게 되며, 그 근처를 비행하던 비행선은 의무적으로 구조 작업을 수행하도록 되어있다.
탈출선은 구형의 모양을 띄고 있다. 어차피 대부분의 행성, 위성에는 공기저항이 없기도 하고, 나중에 만약 역추진을 하게 되더라도 유리하다. 아폴로 착륙선 같은 모형이었다면 넘어졌을 때 답이라는 것이 사라진다. 아, 참고로 장거리 도약은 EM 드라이브의 핵심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애플파이는 1AU 거리를 한 달 안에 주파할 수 있다.
OT 기억을 더듬어 메인 컴퓨터를 켰다. 브리핑 시작 명령어를 입력하니 현재 위치와 현재 시간, 근처 우주 노선 정보, 블랙박스 기록이 나오기 시작했다. 애플파이 우주선이 4km 정도 되어서, 영상이 아닌 기록물 형태로 화면에 띄워졌다. 의미 있는 기록은 이 정도였다.
[MainCom 20160229 14:08] Contact with NASA. Long-Range Leap permitted. 12AU Leap waiting.
[MainCom 20160229 14:32] 12AU Leap Process Initiated.
[SubCom 20160819 03:29] Collision with Astroid B612. Critical Damage. Air Outflow. Leap Halted.
[MainCom 20160819 06:31] Unable to repair. Initiating Evacuation Process.
그렇다면 아마, 이론적으로는 이 근처에 다른 탈출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있어야 했다. 때마침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MainCom 20160820 03:29] Current Location: Io, the moon of Jupiter / 5.7AU far from Sun / Evacuating Reason: Astroid Collision / Refugees nearby: 0
탈출자가 없다. 탈출자가 나 혼자일 수도 있는 것이고, 다른 탈출자는 아직도 우주에서 표류 중일 수 있다 (사실 기업이 원래 그렇지만, 이 항공사는 스위트룸부터 탈출을 보장한다). 순간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2016년 8월 21일 — 2일차
어제 하루 종일 낙담한 채로 있었다. 천정 유리창에서 아주 멀리서 도약 중인 우주선이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공군인가 보다. 공군은 임무 수행 중 구조 의무가 없다. 다만 공군의 활동 범위라는 것은 여기에 다른 민간 우주선이 자주 왕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구조될 확률이 높다는 것도 뜻한다. 잘하면 며칠 이내에 구조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에겐 가족이 있다. 101 오디션 프로그램도 결말은 봐야겠다. 근데 솔직히 무섭다. 내가 지금 일기에 표현하는 데 는 한계가 있지만, 어제는 거의 한 두 시간 동안 울었다. 무서워서 배가 떨리는 느낌을 아는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살 확률이 높은 편이다. 그동안 이런 실종사고는 많았고, 대부분은 구조되었다. 살아나가고 싶은 욕구가 절실하게 느껴진다. 나는 살고 싶다. 살아야 한다.
2016년 8월 21일 — 2일차
자, 일단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해 보자. 이 탈출선에는 원자력 연료가 달려 있어 최소 몇 년간은 전기와 난방이 제공된다. 전기는 나중에 생각하자. 물과 식량은 10일 치 정도가 있다. 저 밖에는 앞대가리가 깨진 우주선이 표류 중이며, 지금 지속적으로 구조 요청 신호를 내보내고 있다. 기본적인 선외활동을 할 수 있는 선이 우주복도 있다. 우주선을 전부 분해해버리더라도 재조립할 정도로 상세하게 설명된 우주선 설명서와, 라디오 기능으로 쓸 수 있는 통신장치 등도 있다. 지구 근처라면 꽤나 다양한 방송이 나오겠지만, 목성까지 방송이 도착할 리는 없다. 내가 들을 수 있는 뉴스는 정말 긴급한 뉴스들뿐이다. 그 외에는 온갖 생필품들이 있다. 설명서가 좋은 점은 HUD로 헬멧 유리창 위에 디스플레이 된다는 점이다. 결론을 이렇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딱 한 가지 밖에 없다. 가만히 있는 것.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탈출 궁리를 하다가 '이오'에 관한 자료를 읽어보았다. 이오는 공전주기가 어마어마하게 길다. 자전은 지구의 달처럼 공전 주기와 일치한다. 지금 내가 있는 위치는 태양을 바라보는 이오의 바깥 부분이다. 10일이 지나더라도 해가 지지 않을 것이다.
2016년 8월 22일 — 3일차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강하게 송신된 구조 전파에 말이다. 아마 통신장치가 고장 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세 가지 사실이 신뢰할 수 있어진다. 첫 번째는 아무도 구조 신호에 응답하지 않는 것, 두 번째는 주변에 탈출자 신호가 잡히지 않는 것, 세 번째는 애플파이를 포함한 어떤 우주선과도 통신이 되지 않는 것이다. 모선에는 중앙부에 통신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예비 통신 시스템까지 총 4개의 통신 장치가 있다. 모선의 통신이 고장 났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또 통신 장치가 고장 났다면, 어제 날아간 우주선은 공군이 아니라 그저 구조 신호를 듣지 못한 우주선일 수 있다. 우선 통신 장치를 고쳐야 한다. 통신장치를 고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이 우선이다. 선외 우주복을 입고 밖에 나가보았다. 땅은 노란색이었다. 우주선이 낙하하며 바닥에 끌린 자국이 보였다. 감속장치로 사용된 보조 로켓은 연료가 소진된 채 탈출선과 케이블로 연결되어 있었다. 저런, 세상에. 우주선의 반대편에 외피가 찢어진 채 파이프들과 전자 장치가 보였다. 20분 동안 유심히 들여본 결과, 한 케이블에 "Main Communication Module"이라고 태그가 달려있는 것을 찾았다. 좋다. 왜 고장 난 것인지 알아내야 한다. 일주일 이내에!
2016년 8월 22일 — 3일차
하, 참. 웃어야 하는 것인지 울 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저 웃음만 나온다. 방금 전 선외 활동을 했을 때, 헬멧 디스플레이에 표시되는 안내 장치를 보아도 어디가 고장 난 것인지 모르겠다. 정말 고치지 못하겠다. 내가 그래도 나름대로 학창 시절 때는 공학으로 상도 타고 그랬는데... 짜증 난다! 돌을 집어던졌다. 멀리도 날아간다. 이오는 중력이 달과 비슷하니, 그럴 것이다. 은근 재미났다. 돌을 몇 개 더 던졌다. 조금은 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주먹 정도 크기의 돌을 내리꽂아서 던졌다. 아니 근데 바닥에 돌이 부딪치면서, 돌이 깨졌고, 그중 한 조각이 우주선 쪽으로 날아갔다! 오 하느님... 여기서 더 고장 내면...
근데 그 통신 모듈이라는 상자에 닿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천만다행이었다. 설마 손상된 곳이 없는지 염려되어 가까이 다가가 먼지를 닦아보았는데, 불이 꺼져있는 LED가 있었고, 옆에는 Main Power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렇다. 나는 콘센트가 꽂히지 않은 전자기기에 힘을 쓰던 중이었다. 허탈했다. 전원 케이블이 끊어진 것이었다. NASA는 이런 상황을 대비해 케이블 모양을 통일해 놓았다. 여분 케이블을 찾지 못해 전등에서 하나를 떼 연결했다. 제발 NASA, 이 일기를 본다면 비상용품 좀 찾기 쉽게 두세요.
2016년 8월 23일 — 4일차
희소식이다! 통신 장치가 복구되었다. 감격스러워서 어제는 바로 잤다. 주변 주파수를 잡아 통신을 연결하는 데 4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이다. 일어났을 때는 곧 다른 우주선이 날아와 나를 구할 것이라는 생각에, 살아 나갈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 들떠있었다. 구조 신호 통신 기록을 확인했다.
[MainCom 20160822 23:44] Contact Failure. Refinding...
[MainCom 20160822 23:48] MotherShip Found. Refinding…
[MainCom 20160822 23:56] No Other Starship Found Nearby. 356 attempts to find a Starship.
없다. 난 또 혼자다.
[MainCom 20160823 02:33] Refugee Found.
[MainCom 20160823 02:41] 3 Refugees Found. Distance: Approx 3600km, 5400km, 6400km.
그래도 다른 탈출자 신호는 잡히기 시작했다. 4배 더 많은 사람은 4배 더 강한 신호를 만들고, 4배 더 높은 구조 확률을 만든다. 이오에는 전리층이 없어 탈출선들 간의 통신은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어디인가?
라디오로 방송되는 긴급 방송은 없었다.
2016년 8월 24일 — 5일차
오늘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이 탈출선은 연료를 최대한 아끼도록 설계되어 있기에, 탈출 이후에 많은 연료를 쓰지 않았다. 또 탈출선에는 최소 2번 달을 탈출할 수 있는 엔진의 연료가 있다. 이오의 중력은 달과 비슷한 수준이니, 여기서 탈출할 가능성이 없진 않아 보인다. 내 힘으로 이오를 탈출 가능한 것이다!
2016년 8월 24일 — 5일차
방금 전에 한 생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탈출한다 하더라도 도약 엔진이 없는 이상 5일 동안 이동할 수 있 는 거리는 멀지 않다. 사실 모선의 도약 엔진이 있다 하더라도 0.2AU를 겨우 갈까 말 까이다.
2016년 8월 24일 — 5일차
방금 애플파이, 즉 모선의 메인 컴퓨터와 교신에 성공했다. 모선에는 6.3AU 거리를 비행할 수 있는 연료가 있다. 모선의 앞 500m가량은 심각하게 파손되었다. 대부분의 시스템은 정상적으로 동작한다. 모선의 앞 부분에는 쓸 데 없는 연구 시설들이 있으니, 필수적인 부분은 아니다. 관리 계정을 탈취해 우주선의 앞 부분을 분리하면 된다.
그러다가 생각을 또 말았다. 엄밀하게 이 모선은 NASA와 항공사의 소유물이므로 나는 엄청난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다른 모선이 수거해가면 내가 희생할 실험실의 일부를 복구할 수 있다. 가격은 천문학적 단위이다. 이런 책임을 전혀 지지 않을 완벽한 계획, 즉 구조 요청이 있는데 뭐 하러 이런 행동을 할까? 일단 플랜 B로 남기기로 했다. 이 방법이 위험부담이 너무 큰 것도 있다.
2016년 8월 24일 — 5일차
일단 구조 신호는 지속적으로 송신되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연락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참 착잡하지만, 그동안 할 수 있는 일은 생존 매뉴얼을 반복해서 읽거나 플랜 B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차피 탈출선 안에 있는 한 5일은 꽤나 안전하게 살 수 있다. 다른 우주선들도 구조 준비 작업을 하려면 하루 정도는 필요하다. 아니면 내가 이 행성에서 먼저 나가는 방법도 있겠다. 내가 이 안에서 살 수 있는 것은 길어야 일주일이다. 그 이상 되면 위험해진다.
오늘부터 활동량을 줄이고 수면 시간을 최대한 늘리기로 했다. 하루에 두 끼를 먹으면 2일 치 식량으로 3일을 살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은 5일 치 식량으로 7일 정도를 살 수 있다. 중간중간 몇 끼를 굶게 된다면 며칠을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15일을 넘기지는 못할 것이다. 애초에 이 항공사가 10일 치 식량만 넣어놓은 이유도 구조 작업이 빠르게 진행된다는 것의 홍보 전략인데, 순 엉터리다. 아마 내 탈출 선의 신호에도, 대형 모선의 구조 신호에 대한 응답이 없다는 것은 기업이 통신을 차단한다는 의미도 된다. 아마 지금 사고가 난 것을 덮기 급급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사고가 난 모선에 대한 긴급 뉴스가 나오지 않는 것도 설명이 된다. 살아나가 더 이상 다른 희생자들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 이유가 한가지 더 생겼다.
2016년 8월 26일 — 7일차
어제는 하루를 꼬박 잤다. 일어나자마자 허기가 져서 아침을 (이곳에서의 하루는 내 수면을 기준으로 넘어간다고 정했다) 먹었다. 아침 식사를 하며 각종 브리핑을 들었는데, 안 좋은 소식이 있다. 모선의 가속도계에서 힘이 감지되고 있다. 목성의 중력인 것 같다. 만약 너무 늦는다면, 애플파이를 타고 탈출할 충분한 시간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플랜 B의 희망인 애플파이가 사라진다. 플랜 B의 필요성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한다.
2016년 8월 27일 — 8일차
오늘도 아무 연락도 없고, 아무 뉴스도 없다. 모선에서는 한 통의 알림이 왔다.
[MainCom 20160827 04:32] Status: Drifting / Being Affected by Gravitational Field
정말 자유낙하를 시작 중이라는 것이다. 심각하게 고민이 된다. 여기서 애플파이를 타고 탈출한다면 목성에 떨어질 애꿎은 우주선을 구하는 셈이기도 하다. 연구실을 버린다 하더라도 항공사는 덜 손해 보는 것이다.
이제 모선을 탈취하면 안 되는 이유가 위험성 뿐이다. 근데 지금 상황을 보니, 내가 구조되지 못할 확률이나 모선을 조종하다 죽을 확률이나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