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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Approximately translates to 150 Years of Modern Japan. The Bankruptcy of Science, Technology, and the Total War System.

요약

일본은 150년에 걸쳐 정치, 관료, 군사, 산업, 학문, 언론의 뿌리 깊은 유착으로 경제 성장, 국력 증진을 우선시하는 대국주의, 열강주의 내셔널리즘에 입각하여 성장했다. 이는 과학기술에 대한 무비판적 신뢰와 무조건적 예찬이 뒷받침되었다. 과학 기술의 발견과 개량은 생산 증대, 경제 성장, 생활 개선을 가져오고 발전과 진보를 견인한다는 명제는 메이지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계급, 사상, 신조를 불문하고 지지되었다. 과학 기술의 진보와 그것이 떠받쳐온 경제 성장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근대 사회를 이끌어온 가치관에 되돌아 보아야 한다.

개화

기술은 과학에 기초에 개발된 것도 아니고 과학이 기술적 응용을 목적으로 연구된 것도 아니다. 지렛대의 원리가 역학적으로 증명되기 전에도 지렛대는 사용되었고, 제철 기술이 화학적 환원 반응이라는 것이 증명되기 전에도 제철 기술은 존재했다. 과학 기술이라는 것은 18세기에 형성되었고 그 전까지는 과학과 기술은 별개였다. 즉 기술은 이론화 없이 도제 수업에서 전수되어 왔다. 초기 서구 발명가들은 학문적 관심이 아니라 물건의 제작에 대한 본능적 열의로 발명하였다. 이 시대에는 발명의 성공이 부로 연결될 가능성을 특허 제도와 시장의 경쟁으로 보증하고 있기도 했다. 이 연장선 상에 과학 기술에 대한 자연의 정복이라는 근대인의 사상이 등장한다.

이에 19세기 당시 일본궁리학이라는 서양 과학 기술 계몽서의 출판 붐이 일었다. 막부 말기에 대지진과 천변지이가 계속된 것이 민중들의 동요를 낳았다. 지배층의 권위가 실추되며 그간의 지식이 전복되고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상황에 직면하며 불안해 어쩔 줄 모르던 유신 직후 민중은 문명개화라는 기운에 공명했다. 이후 궁리물로 분류되는 책들이 다수 출간되어 궁리학을 문명개화의 상징으로 결론 지으며 궁리학, 즉 근대물리학의 우월성을 대중에게 설파했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메이지 초기 기술자 교육이 국가 주도로 시작됐다. 공부대학 도검 헨리 다이어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기술자야말로 진정한 혁명가다... 왜냐하면 기술자의 일은 사회와 경제를 변혁할 뿐 아니라 단순한 법률 제정에 비해 훨씬 강력한 여러 가지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후 제국대학이 설립되고 과학 용어가 통일되며 대학 강의가 외국어에서 일본어로 변경되었다. 순수 학문의 업적은 근대 국가의 상징으로 동작했다. 이 경향은 대국 의식 고양과 함께 강화되어 갔다.

일본이 기술적으로 성공한 이유는 타이밍이었다. 서구에서 에너지 혁명이 일어난 뒤 반 세기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추격이 가능했다. 하지만 민간의 자본 축적이 빈약했다. 일본의 근대화는 정치 권력이 주도했고, 군관이 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첨단 기술 다수가 처음에 평가 받은 곳이 적어도 메이지 시기에는 군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당시 시장은 군수시장 뿐이었다. 이 점은 대학 연구도 마찬가지다. 제국대학 이념이 국가제일주의와 실용주의라고 하지만, 민간에 첨단 산업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군사기술로 발빠르게 근대화를 꾀하던 일본에서 실용주의의 협력 대상은 우선 군부였다.

일본의 급속한 자본주의화는 다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 근대 과학 기술 습득의 적시성
  • 국가의 강력한 지도와 경영자의 출현
  • 민중의 높은 해독률
  • 효과적인 교육 제도의 형성
  • 민간 발명가의 탄생
  • 농촌 노동력의 수탈
  • 지역 공동체의 파괴

일본은 근대화 이후 중국, 조선은 근대화가 가망 없다고 단념하고 탈아입구를 결론 내린다. 메이지 중기 일본에서 열강주의 내셔널리즘이 태동했다.

총력전

일본은 공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식민지에 대규모 공업단지를 구성하였다. 화약류의 백화점이라고도 불린다. 이런 경이적인 사업 확장에는 조선총독부와 현지 주둔군의 지지가 있었다. 식민지는 군의 영향이 압도적이기에 식민지는 총력전 체제의 실험장이 됐다. 물론 거대 발전소의 전력은 공업 단지와 일본인 주택지에만 사용되었다. 토지를 빼앗기고 강제 이주를 당하거나 가혹한 노동에 내몰린 현지 식민지민에게는 어떠한 혜택도 없었다. 에너지 혁명에 의한 최신 공업 발전은 한편으로 식민지의 자원과 노동력 수탈에 의해 지탱되었다.

테크노크라트 (기술관료)

반문화주의와 반지성주의가 횡행하는 전시에도 과학은 자원 문제 해결을 위한 전능자로 간주되었다. 관료들은 생산 확충을 현실성 있게 전개하려면 전문 기술자가 정책 수립의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메이지 초기 일본 기술관료제의 맥을 잇는 것이다. 기술국책론에서 기술이 국방국가의 가장 중요한 자원 중 하나로 인식되는 한 국가적 자원으로 이를 활용해야한다는 국가적 요구이다. 자유경제 대신 통제경제를 선택하고 기술행정을 국가가 일원적으로 관리하고 지도하는 것이야말로 나치 독일의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의 계획경제에서 영향을 받은 테크노크라트의 목표였다. 이 당시 반대론도 등장하였는데, 유사한 통제안이 만들어져 모든 산업이 국가 통제로 들어가 사기업의 입장에서 사적 권리와 자유주의 경제에 타격을 받는다는 것이다. 반면 이 당시 정부 관리는 통제 경제가 자본주의의 원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경제의 자유성을 국가 권력으로 제한하고 폐해를 잘라내어 더 큰 발전을 추구하려는 것으로 국영화가 국가사회주의라는 비판은 옳지 않다고 반론했다. 육군 내부에서 도조 히데키 등의 통제파와 혁신 관료의 목표는 통제 경제에 의한 생산력 증강이었다. 이를 위해 연구 통제를 동반한 연구자의 동원, 인적 자원의 유효한 활동을 위한 사회 전체의 합리적 재편성을 필요로 했다. 결국 뉴딜형이건 파시즘형이건 총력전 테제를 위한 체제 구축은 전근대성을 도려내고 근대화를 꾀하려는 충동을 간직하고 있던 것이다.

결국 대학 자치와 연구의 자유 이념을 포기하고 군산학이 협동하는 것으로 연구의 일원적 지배를 실현했다. 다만 일본연구자를 대상으로 지난 수십년간 학문의 자유가 실현된 때가 언제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전시'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이공계 학자 대부분은 연구비가 윤택하던 전시 과학 기술 붐에 만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인과 중국인, 그리고 연합군 포로가 열악한 노동조건 하에서 일을 강요당했다. 조선인이 가장 많아 1939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725,000명이 연행되었다. 이를 반성하는 과학자는 별로 없었다.

전후

미군은 일본 관료기구 중 내무성만 해체하였다. 패전 당시 미국의 점령 정책이 완전한 비군사화에서 경제 안정으로 전환되며 대부분의 군사 생산 능력이 유지되었다. 현재의 경제산업성의 전신인 상공성과 기획원은 전시 통제경제를 지휘한 핵심 기관이었음에도 방치했다. 이후 일본 경제의 참모본부가 되었다. 일본 내부에서 세계대전의 패인으로 과학전의 패배를 거론하였다. 허나 이는 여러 방면에서 오류가 있는 지적이다. ① 우선 패인은 자원에 있다. 일본미국과의 전쟁에 나선 이유는 태평양 전쟁이 단기 결전으로 바뀔 것이라는 주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총력전은 자원의 양에 기반하며, 과학은 자원의 압도적 부족을 만회할 정도는 아니다. 즉 과학전의 패배를 패인으로 거론하는 것은 책임 회피이다. ② 또한 이 과학전의 패배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는 중국에서의 밀리고 있던 일본군의 상황을 무시한다. 단순하게 과학전의 패배라고 침하는 것은 아시아 침략에 대한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외면하고 은폐한다.

이런 책임의 결여에도 과학 기술의 낙후를 패인으로 도출한다면 그 결론은 과학 기술의 진흥이 된다. 때문에 과학 입국의 중심적 주도자는 과학자와 기술자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합리와 과학은 그 자체로 비인간적 억압의 도구가 될 수 있고 그에 대한 반성 없이 과학 진흥을 외치면 결국 몰락한다. 이는 전후 원자력 개발에서 드러난다.

전시의 여러 제도가 전후 경제 제도로 계승되었고, 전시 산업이 전후 주요 산업이 되었다. 일본은 군사기술에 에너지를 쏟지 않아 오늘날의 기술 대국이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평화기술우위설은 사실 검증으로 부정된다. 예를 들어 다음을 살펴보자.

  • 도시바, 히타치, 마쓰시타는 전시 군수생산으로 성장했다.
  • 소니의 모체는 해군기술연구소 인맥이다.
  • 도요타, 닛산, 이스즈는 자동차제조사업법의 혜택을 입었다.
  • 미군의 점령 하에 항공기 생산이 금지되며 군용기 업체와 군 연구소 기술자들이 자동차 산업으로 옮겨 위의 자동차 기업을 구성했다.
  • 군 기술자는 국철과 철도 연구소에 자리 잡아 신칸센을 개발한다.
  • 전후 항공기 산업 또한 자위대에 의존해 성장했다.
  • 도시바에는 방위장비 부문이 있어 지대공미사일을 개발, 제조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원자로와 플루토늄을 제조할 수 있는 도시바는 핵 미사일을 만들 수 있는 회사이다.

그리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미군의 병참 기지 역할을 수행한다. 일본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최대 요인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1968년 미국에 이어 자유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일본은 또다시 아시아 인민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대국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극심한 공해 또한 발생했다. 고도성장에 공해가 뒤따른 것이 아니라 공해를 방치한 채 고도성장이 이루어졌다. 이후 공해 규제가 느슨한 국외를 선택하며 공장지를 이전했다. 간단히 말해 일본은 자본에 공해를 끼워 수출하는 것이다. 이는 전시 대동아공영권 구상의 전후 복제라고도 할 수 있다. 생산 제일, 성장 제일이라는 메이지에서 다이쇼까지의 150년의 행보는 경제 성장을 추종하며 약자의 희생을 강요했다.

이제 더 이상 이윤을 올릴 공간이 없는 곳에서 이윤을 무리하게 추구하면 영향은 격차와 빈곤의 형태를 띠고 약자에게 집중될 것이다. 그리고 약자는 압도적으로 다수의 중간층이 몰락하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기술의 혁신에 의한 무한 성장은 21세기에는 환상이다.

일본경제 또한 군수 생산의 확대를 기대하고 있다. 이미 일본 제조업의 대부분은 중국한국에 경쟁력을 잃었으며 일본의 대표적 기업 도시바도 가전 부분을 중국에 넘겼다. 남은 것은 군수 생산 뿐이다. 특히 일본의 헌법 개정이 논란이 되고 있는데, 헌법 개정이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이끌어가는 것이라면 군수 생산 중시는 일본전쟁을 원하는 나라로 꾀어내는 것이다. 즉, 압도적인 자금과 정보, 과학 기술을 손에 쥐고 있는 산군학복합체는 21세기 리바이어던으로 성장하여 전쟁을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원자력

전후에 과학 기술에 의한 재건을 주장하며 과학 기술 환상을 퍼졌는데 이는 원자력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물리학자들은 원폭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원자폭탄은 유력한 기술력, 풍부한 경제력의 위대한 소산이라고 여겼다. 전근대의 거대 전함처럼, 일본은 원자력 기술을 일류국의 상징으로 간주했다. 이는 일본이해하기 어려운 원자력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일본은 원전 사용과 비경제적 핵연료 재처리를 고집하고 있고 핵무기 금지조약에 서명을 거부한다. 일본은 미래에 핵무장의 선택지를 남기고 있다.

결론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구호 아래 규제 완화를 이야기하며 사회보장을 억제하고 약자를 위한 안전망을 속속 철폐했지만 관료와 산업의 총력전 체제는 건재했고 군수, 원전 기업은 국책 회사로 보호되었다. 식산흥업, 부국강병에서 시작되어 대동아공영권과 총력전 체제에 의한 고도국방국가 건설을 거쳐 경제성장, 국제경쟁이라는 국부 개념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대국주의 내셔널리즘과 결합한 과학 기술 진보에 기반해 생산력을 증강하고 경제성장을 추구해온 근대 일본 150년의 흐름과 결별해야 한다. 정말 경제성장을 지속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근대과학과 자본주의는 끝없는 확대와 성장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 점들이 반드시 인간의 행복과 정신적 충족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일본, 그리고 선진국이라고 불려온 나라는 성장 경제로부터 재분배의 경제로 향해야 할 시대에 도달한 것이다. 이 200년간의 과학 기술 진보와 경제 성장은 강력한 생산력을 창출했지만 동시에 지구를 몇 번이나 파괴할 군사력을 낳았고, 소수 국가에 의한 지구 자원의 수탈을 가속화해 전 세계의 부를 극히 소수의 사람들 손에 집중시키게 했다. 유한한 자원 에너지를 소중히 해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고, 세제나 사회보장 제도를 통해 빈부의 차를 없애가는 것이야말로 현재 필요한 일이다. 과거 동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했고 두 차례의 원폭 피해를 보았으며, 후쿠시마 사고를 일으킨 나라가 책임 있게 군수 산업 철수와 원자력 사용의 탈각을 선언하고 장래 핵무기의 가능성을 확실히 부정해야 한다. 경제성장, 국제경쟁 대신 저성장하에서 민중의 국제 연대를 추구하고, 그것으로 세계에 공헌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

  • 테크노크라시가 문제가 아니라 테크노크라시를 위장한 국가사회주의가 문제인 것 아닐까?
  • 정치, 관료, 군사, 산업, 학문, 언론 유착으로 성장한 대부분의 선진국의 사회보장망이 확충되어야 한다는 것은 동의한다. 하지만 이것이 무조건 반과학주의-반지성주의적인 방향으로 대치되어야 할까? 일례로 새로운 과학 기술의 발전은 환경 파괴 물질의 감축에 기여한다.
  • 20세기적 독재적 국가주의로는 더 이상 급격한 사회 성장을 이뤄낼 수 없다는 점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증명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전환을 반드시 재분배적 사회보장으로 연결할 수 있을까? 자유 경제와 사회 보장 사이의 갈등은 언제나 어려운 질문이다.
  • 중간까지의 일본의 역사에 대한 분석에는 동의하지만 결론에서 급격하게 성장경제에서 재분배의 경제로 향해야한다고 함축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재분배가 어떻게 이렇게 경제적 폐해를 해결하고 사회 정의를 이룬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