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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개발의 길목에서

Approximately translates to At the Crossroads of Economic Development.

경제 개발의 길목에서

두드려라! 그러면 문이 열릴 것이다.

한국에서는 자고로 선거 때만 되면 통화량이 급팽창했다. 정부의 선심 행정으로 예산이 팽창하고 금융이 방만해지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금융 민영화, 기업공개, 외부감사, 경영의 투명화는 선진화로 가는 길이었는데, 그 후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일관적으로 시행되지 못했고, 1997년에 외환위기를 당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나라와 민족의 명운을 걸고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하다가 패망했다. 그러나 일본은 다시 일어나서 지금은 세계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는데, 그 배후에는 중화학공업 건설이 있다. 나는 지금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거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경제의 명운을 걸고 중화학공업을 건설해보려고 하는 것이다'라는 요지였다. 이어 "장관!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일을 해봅시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알겠습니다. 자금 계획을 만들어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청와대를 나왔다.

박 대통령은 경제개발과 자주국방을 국가 경영의 2대 목표로 내세웠다. 정치적 민주화는 경제개발과 자주국방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관념적으로 민주화를 앞세우는 지식인들을 좋게 보지 않았다. 재무부 장관으로 취임한 직후 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 내가 미국에서 공부했고 교수 출신인 점을 인식해서인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우리의 이상이지만, 지금은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밥을 먹여주고 나라를 지켜줄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배고픔과 북쪽의 무력 도발에 대비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인데, 지식인과 학생들은 왜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박 대통령은 중남미의 많은 개발도상국이 정치적 불안과 빈곤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정치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경제개발을 일관적으로 추진할 수 없고, 경제개발이 되지 않기 때문에 빈곤에서 탈출할 수 없고, 또 이로 인해 정치 불안이 계속되는 악순환을 겪고 있는데, 우리의 사정도 그와 같다고 보았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정치권을 강력히 통제했고, 그것이 잘못이라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하고 맞섰던 것이다.

국내에서는 박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공격하지만, 외국에서는 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학자들도 그 당시의 정치 상태를 '권위주의'라 하지 '독재정치'라고 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3권이 엄연히 분리되어 있었고, 비밀투표에 의한 선거제도가 있었으며, 언론의 거센 비판과 학생들의 데모가 끊이지 않은 나라의 정치 상태를 스탈린이나 김일성 독재정치와 같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령 그 당시에 한사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치인이 있었다 하자. 만약 그가 국가 경영의 대임을 맡았다면 이승만 대통령이 개탄했던 '하늘 아래 둘도 없는 국회'를 어떻게 요리해서 국정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을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말은 옳지만, 다른 방법이 없을 경우 가치 있는 목적을 포기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도 있다. 여기에서 도덕가와 경세가經世家의 길이 갈리는 것 같다. 하여튼 부정부패를 없애는 것은 아직까지도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그가 제시한 경제운영의 기본 방향은 명백히 방향 전환을 예고하고 있었다. 즉 안정, 능률, 개방, 경쟁, 민간 주도 등을 내세우고 있었고, 여기에는 물가 안정을 최우선시하는 전두환 대통령과 그를 보좌하는 김재익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 경제는 이른바 '4고 3저', 즉 고임금, 고금리, 고지가, 고물가와 저기술, 저능률, 저부가가치라는 난제를 안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자면 전면적인 구조개혁이 불가피했다.

이와 같이 정부는 개방화, 자율화의 추세에 안주해 단기자본 도입과 그 용도를 방관해오다가 외환위기가 터진 이후에 비로소 금융기관 및 기업의 해외 차입 실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구원 요청은 IMF 회원국의 당연한 권리이고, 바로 그 목적을 위해 IMF가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그 당시 IMF가 즉각적으로 300억 달러 정도만 한국에 투입할 수 있었다면, 한국은 외환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IMF는 이러한 즉각적인 대응에 실패했다. 그 이유는 IMF의 설립 목적과 기능에 상응하는 재원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경제 회복의 원동력은 모진 시련에 굴하지 않고 경영상의 난관을 돌파하려는 우리 기업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있다고 봐야 한다.

동북아에는 각종 천연자원도 많고, 일본, 한국, 중국이 세계에서 중요한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과거의 쓰라린 역사 때문에 세계에서 지역적 협의체가 하나도 없는 유일한 지역으로 남아 있다. 소련의 공산 체제가 붕괴하여 냉전 체제가 사라진 오늘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정치적 화해와 경제협력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2000년부터 여러 국제회의와 국내 논단에서 동북아 개발은행 설립을 촉구하는 동시에 한국을 동북아 물류의 중심지로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공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유리한 조건이면 무엇이든 실행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실효를 거두도록 하라"는 말이었다. 그 후 쑤저우 시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규제에서 벗어나 불과 10년 만에 오늘과 같은 초현대적인 신도시와 첨단 공업도시, 일류 대학원 도시의 복합체를 건설해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오로지 이 공문 한 장의 덕택이라고 하여 그것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삼성과 LG를 포함한 세계 저명 기업들이 입주해 있었고, 기업하기 좋고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말을 들었다. 자유화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실감하는 동시에 중앙 정부의 영단도 그러려니와 이 공문 한 장을 길이길이 고마워하는 쑤저우 지방 공직자의 마음씨가 내 가슴에 와 닿았다. 개방화와 자유화에 회의적인 한국 학생들에게 이것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이끄는 한국선진화포럼은 2007년 7월 기업의 후원을 열어 80여 명의 학생들을 푸둥과 쑤저우에 파견했다.

셋째로 두바이는 철저하게 수월성(秀越性, Excellence)을 추구했다.

이 나라 왕은 자기 나라를 먹여 살려온 석유자원이 2020년대에 고갈될 것으로 예측되자 그에 대비해 서비스 산업으로 눈을 돌렸고, 그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망설이지 않고 허락했다. 1인 전제의 왕조하에서 기업에 최대한의 자유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그것이 세계 각국의 투자를 유치하는 자력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노사 분규가 없는 이유는 석유 판매와 관광 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입을 국민에게 나눠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녀가 결혼하면 왕이 거액의 축하금을 내린다는 말도 들었다.

상품의 품질, 가격, 기술면에서 우리가 낙후되어 있으면 중국은 다른 나라의 상품과 서비스를 택할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우리는 중국에 대한 근접성의 이점을 지렛대로 하여 우리보다 앞서 있는 외국 기업들과 합작하는 길을 택할 수 있다. 그러자면 한국이 기업하기 좋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 외국 기업들의 투자를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국제 경쟁을 떠나 우리가 중국 경제 성장의 파급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극대화하는 길은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해서 한국을 동북아의 인류, 물류 중심지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1960∼1980년대에 쌓아 올린 경제적 기반 위에서 1990년대 초에 정치적 민주화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듯이 민주화 과정에도 문제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문턱에서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해 있다. 먼저 정치면에서는 후진적인 정치 문화를 청산하지 못해 대의정치의 운영이 난항을 겪고 있고, 국회가 다원화된 민주사회를 통합하는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로 사회면에서는 이념의 갈등, 집단적 이기주의, 계층 및 지역 간 격차와 대립, 노사 분규, 법치주의 이완, 국민 교육 정책의 방황 등이 사회적 통합을 어렵게 하고 있다. 셋째로 경제면에서는 중국 경제의 도약으로 우리의 전통적 산업이 경쟁력을 잃고 중소기업은 재생의 방도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수출이 성장의 버팀목이 되고 있지만 소수 품목에 집중되어 있고 소재와 부품의 수입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고용 흡수력이 미약해 청년실업 이 늘고 있다. 농업 개방이 불가피한데 농업의 기업화, 과학화 추세에 적응하지 못하는 농민들은 실의에 빠져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국가 문제들을 해결하자면 먼저 우리나라가 어디로 갈 것이냐 하는 문제부터 확실히 해야 한다. 고난과 혼돈 속에서는 갈 길을 잃거나 방황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갈 길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자유민주와 시장경제 체제다. 그런데 정치권과 정부는 민주화 과정에서 분출되고 있는 다양한 욕구를 국가이념의 원리에 따라 일관적으로 관리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면서 사태가 더욱 복잡해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끝으로, 국민들에 대한 경제교육이 부족했다. 천연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수출로 먹고살아야 한다. 그러자면 노동과 머리로 경쟁할 수밖에 없다. 노동으로 경쟁하자면 노사勞使가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하고, 머리로 경쟁하자면 과학 기술과 사회 각 분야의 문화 수준을 높여야 한다. 그리고 모든 국민이 잘살 수 있게 되려면 경제성장과 공정 분배의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가치관을 심어주도록 좀 더 노력했어야 했다.

양측의 토론을 듣고만 있던 브레진스키 박사가 입을 열었다. 그는 "나는 한국의 방침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국북한의 핵화를 반대하는 동시에 북한의 핵화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방침에도 반대하고 있다. 그러면 미국이 어떻게 하란 말이냐?"이어서 그는 "한국미국의 보호 하에서 무사하기만 바라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한국은 위험을 무릅쓰고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브레진스키 박사의 일침이 나를 찔렀다. 나는 그의 발언을 받아 "그런 것이 아니라 양국의 목적은 하나이지만, 목적 달성을 위한 전략을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그 후 다행히 6월 15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핵 동결 약속을 받아내면서 일단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브레진스키 박사가 "한국은 위험을 무릅쓰고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것이냐?"라고 한 말은 지금도 나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