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두 가지의 전쟁목적이 있다고 공언하였다. 첫째는 한국의 독립유지와 영토보전이요, 둘째는 극동의 교역을 위하여 지속적인 문호개방의 유지였다. 일본의 정치가들은 되풀이하여 이번 전쟁이 일본 자신만이 아닌 모든 민족의 문명을 위한 싸움이라고 선전하였다. 그래서 동양에 파견된 영미인, 상인, 선교사들 및 기타인들이 모두 일본이 언명한 것을 이행하리라고 믿었다.
한국 국민과 정부는 한국의 독립유지와 영토보존을 위해서라는 일본의 정중한 약속을 믿고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이 조약의 결과로서 한국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일본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였다. 또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패, 과도한 세금징수와 가혹한 행정에 허덕여왔던 한국 국민과 정부는 애원과 희망으로 일본인들을 환영하였다. 그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이 부패한 정부 관리 들을 엄격히 처벌해 주고, 일반 백성에게는 정의감을 북돋워 주고, 정부 당국의 정치.행정에 대해 진실한 조언자가 되고, 한국민들의 개혁운동을 잘 인도해 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일본인들은 거듭하여 그들의 한국 진출은 그들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문명국들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문호개방과 모든 백성을 위한 기회균등의 보존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라고 극구 강조하였다. (중략)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태도를 돌변하여 만사에 있어 공평과 기회 균등을 택하는 대신 추잡하고 불공평하고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인 동시에 가혹한 처사를 감행해 왔다. 일본이 한국에 들어온 후에 첫 번째 요구는 한국 영토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미개간지를 하등의 보상도 없이 50년간 그들 에게 양도하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요구는 일본황제 특사인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군을 동원하여 궁궐을 에워싼 가운데 황제에게 동의하라고 강요한 것이었다. 이 조약의 초안은 첫째 한국의 대외적 문제의 관할 및 지휘는 일 본에게 위임할 것, 둘째, 한국 정부는 국제적 성격의 어떠한 회합이나 약정 일지라도 일본의 중개 없이는 결정짓지 않는다는 것을 서약할 것, 셋째, 서울에 일본통감을 배치할 것, 넷째, 한국 내에 일본 주재관을 임명할 것 등 네 가지로 되어 있다. 한국 황제와 대신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가 이를 고집했기 때문에 황제는 이에 동의하느니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17일 저녁까지도 결론을 보지 못하자 일본인들은 "이를 수락하지 않으면 만사에 있어서 즉각적인 파괴를 의미할 뿐이다"며 위협을 가하였다. 공포에 질린 대신들은 주변 에서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듣더라도 일본군들이 살그머니 옆에 접근해 오는 것으로 상상할 정도였다. (중략)
일본인들은 가장 강력한 태도로 조약 체결을 거부하는 참정대신 한규설을 체포하여 가두고, 한국정부의 반대를 무력으로 누르고 조약 체결을 감행하 였다. 그럼에도 일본의 정치평론가나 선전가들은 세계만방에 대하여 이 조약이 마치 한국측의 선의적이며 자진적인 양보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가장 우의적이며 형제적인 우호관계를 가진 체하면서 슬쩍 상대방의 호주머니를 터는 위선가는 공개적인 강도 행위보다도 더욱 경멸해야 할 일이며 잔 인한 일일 것이다.
강제 조약체결 한국민들은 궐기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총칼에 의해 진압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은 무력과 총기로서 한국인들을 진압하고 한국인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그들은 한국의 정부 각 기관을 점령하고 그것을 일본인들의 재정적 권익만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들은 강탈, 강도, 잔인한 흉계 등을 감행하였으며, 이로 인한 3년간의 실질적인 손해는 구체제하 정부의 가장 잔혹한 정치가 50년간 저지른 해독보다 더욱 심한 것이었다. (중략)
이토가 일본에서 1억원(500만불)을 차관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돈은 일본의 특수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다. 재한 일본인 관리들은 본토 봉급의 3-4배를 받았고, 수도공사는 일인들의 거주지인 제물포와 서울의 일본인 거주지에만 설치되었다. 교육기관의 설치는 한국어를 근절시키고 일본어를 대신 가르치려는 것이며, 한국인의 해외유학은 반일주의를 호소.선전할 우려 가 있다고 불허하였다. 행정개혁을 했다고 하나 유능하고 신망 있는 한국인 정치가를 축출하고 일본화한 사람들로 대치한 것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일본정권은 개인 소유지를 군사상의 필요에서 아무런 보상 없이 박탈하였으며 화폐제도를 개혁하여 한국 상인들을 파산상태로 몰아넣었다. 실정이 이와 같은데도 일본인 정치가들은 그들의 모든 일이 전부 한국 국민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항상 '평화', '평화'하지만은 어찌 사람이 기관총구 앞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겠는가. 한국민이 모두 죽어 없어지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국의 독립과 한국민의 자유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한 극동의 평화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 국민들은 조직은 되어 있지 않으나 독립과 자유라는 공동 목표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결합되어 있 으며, 이 목적을 위하여 한국 국민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인의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이기 적인 침략에 대항하고 있다. 어떠한 일을 해서라도 일본인과 싸우려고 결심한 2천만의 한국 국민을 대량 학살한다는 것은 일본인에게 있어서 그다지 흥미 있거나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상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문호개방에 대한 엄숙한 공약을 배반하였다.
이위종(Ye We Chong), "A Plea for Korea," The Independent, Vol. 63, No.3064, New York, 1907.8.22. 이선근, 한국사 : 현대편, 을유문화사, 1963, 946-951쪽에 실린 번역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