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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외계행성 (16誠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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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당시 교내 천체 동아리 애플파이에 지원하며 제출한 단편 소설. 마션을 많이 오마주했다.

과제 본문: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자신이 미지의 외계행성에 있었습니다! 이곳에서의 모험담을 일기처럼 써주세요. (너무 과학적인 것에 연연하지 마세요. 개연성만 있다면 어느 정도의 비과학적 요소도 허용합니다!)

2016년 8월 20일 — 1일차

젠장. 깨어난 지 2시간이 되었다. 탈출선 일지를 작성 중이다.

기억을 다시 되짚어 보자.

나는 분명 애플파이라는 우주비행선을 타고 장거리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우주선에서의 파티를 즐기고, 비행선의 스위트룸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김세정이랑 명동 거리 데이트를 하는 꿈을 꾸고 있었단 말이다, 젠장. 이때가 2016년 2월이었다.

잠에서 깬 것은, 탈출선의 비상벨 소리를 듣고였다. "Oxygen Level Critical"이라고 징징대고 있었다. 산소호흡기…… 참 NASA는 일 처리가 항상 이런 식이다. 간단한 것을 항상 복잡하게 숨겨놓는다.

세계통일정부 법률상, 장거리, 그러니까 10AU 거리 이상의 노선을 비행하는 탑승자는 의무적으로 탈출선 운전 교육을 받아야 한다 (사실 내가 관련 OT 때 많이 졸았다). 탈출선에는 자동 항법 장치가 장착되어 가장 가까운 행성(또는 위성)으로 대피 항로를 설정하며, 탑승자를 수면 상태로 유지한다. 이 과정에서 강한 구조 신호를 보내게 되며, 그 근처를 비행하던 비행선은 의무적으로 구조 작업을 수행하도록 되어있다.

탈출선은 구형의 모양을 띄고 있다. 어차피 대부분의 행성, 위성에는 공기저항이 없기도 하고, 나중에 만약 역추진을 하게 되더라도 유리하다. 아폴로 착륙선 같은 모형이었다면 넘어졌을 때 답이라는 것이 사라진다. 아, 참고로 장거리 도약은 EM 드라이브의 핵심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애플파이는 1AU 거리를 한 달 안에 주파할 수 있다.

OT 기억을 더듬어 메인 컴퓨터를 켰다. 브리핑 시작 명령어를 입력하니 현재 위치와 현재 시간, 근처 우주 노선 정보, 블랙박스 기록이 나오기 시작했다. 애플파이 우주선이 4km 정도 되어서, 영상이 아닌 기록물 형태로 화면에 띄워졌다. 의미 있는 기록은 이 정도였다.

[MainCom 20160229 14:08] Contact with NASA. Long-Range Leap permitted. 12AU Leap waiting.
[MainCom 20160229 14:32] 12AU Leap Process Initiated.
[SubCom 20160819 03:29] Collision with Astroid B612. Critical Damage. Air Outflow. Leap Halted.
[MainCom 20160819 06:31] Unable to repair. Initiating Evacuation Process.

그렇다면 아마, 이론적으로는 이 근처에 다른 탈출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있어야 했다. 때마침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MainCom 20160820 03:29] Current Location: Io, the moon of Jupiter / 5.7AU far from Sun / Evacuating Reason: Astroid Collision / Refugees nearby: 0

탈출자가 없다. 탈출자가 나 혼자일 수도 있는 것이고, 다른 탈출자는 아직도 우주에서 표류 중일 수 있다 (사실 기업이 원래 그렇지만, 이 항공사는 스위트룸부터 탈출을 보장한다). 순간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2016년 8월 21일 — 2일차

어제 하루 종일 낙담한 채로 있었다. 천정 유리창에서 아주 멀리서 도약 중인 우주선이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공군인가 보다. 공군은 임무 수행 중 구조 의무가 없다. 다만 공군의 활동 범위라는 것은 여기에 다른 민간 우주선이 자주 왕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구조될 확률이 높다는 것도 뜻한다. 잘하면 며칠 이내에 구조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에겐 가족이 있다. 101 오디션 프로그램도 결말은 봐야겠다. 근데 솔직히 무섭다. 내가 지금 일기에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어제는 거의 한 두 시간 동안 울었다. 무서워서 배가 떨리는 느낌을 아는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살 확률이 높은 편이다. 그동안 이런 실종사고는 많았고, 대부분은 구조되었다. 살아나가고 싶은 욕구가 절실하게 느껴진다. 나는 살고 싶다. 살아야 한다.

2016년 8월 21일 — 2일차

자, 일단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해 보자. 이 탈출선에는 원자력 연료가 달려 있어 최소 몇 년간은 전기와 난방이 제공된다. 전기는 나중에 생각하자. 물과 식량은 10일 치 정도가 있다. 저 밖에는 앞대가리가 깨진 우주선이 표류 중이며, 지금 지속적으로 구조 요청 신호를 내보내고 있다. 기본적인 선외활동을 할 수 있는 선이 우주복도 있다. 우주선을 전부 분해해버리더라도 재조립할 정도로 상세하게 설명된 우주선 설명서와, 라디오 기능으로 쓸 수 있는 통신장치 등도 있다. 지구 근처라면 꽤나 다양한 방송이 나오겠지만, 목성까지 방송이 도착할 리는 없다. 내가 들을 수 있는 뉴스는 정말 긴급한 뉴스들뿐이다. 그 외에는 온갖 생필품들이 있다. 설명서가 좋은 점은 HUD로 헬멧 유리창 위에 디스플레이 된다는 점이다. 결론을 이렇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딱 한 가지 밖에 없다. 가만히 있는 것.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탈출 궁리를 하다가 '이오'에 관한 자료를 읽어보았다. 이오는 공전주기가 어마어마하게 길다. 자전은 지구의 달처럼 공전 주기와 일치한다. 지금 내가 있는 위치는 태양을 바라보는 이오의 바깥 부분이다. 10일이 지나더라도 해가 지지 않을 것이다.

2016년 8월 22일 — 3일차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강하게 송신된 구조 전파에 말이다. 아마 통신장치가 고장 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세 가지 사실이 신뢰할 수 있어진다. 첫 번째는 아무도 구조 신호에 응답하지 않는 것, 두 번째는 주변에 탈출자 신호가 잡히지 않는 것, 세 번째는 애플파이를 포함한 어떤 우주선과도 통신이 되지 않는 것이다. 모선에는 중앙부에 통신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예비 통신 시스템까지 총 4개의 통신 장치가 있다. 모선의 통신이 고장 났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또 통신 장치가 고장 났다면, 어제 날아간 우주선은 공군이 아니라 그저 구조 신호를 듣지 못한 우주선일 수 있다. 우선 통신 장치를 고쳐야 한다. 통신장치를 고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이 우선이다. 선외 우주복을 입고 밖에 나가보았다. 땅은 노란색이었다. 우주선이 낙하하며 바닥에 끌린 자국이 보였다. 감속장치로 사용된 보조 로켓은 연료가 소진된 채 탈출선과 케이블로 연결되어 있었다. 저런, 세상에. 우주선의 반대편에 외피가 찢어진 채 파이프들과 전자 장치가 보였다. 20분 동안 유심히 들여본 결과, 한 케이블에 "Main Communication Module"이라고 태그가 달려있는 것을 찾았다. 좋다. 왜 고장 난 것인지 알아내야 한다. 일주일 이내에!

2016년 8월 22일 — 3일차

하, 참. 웃어야 하는 것인지 울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저 웃음만 나온다. 방금 전 선외 활동을 했을 때, 헬멧 디스플레이에 표시되는 안내 장치를 보아도 어디가 고장 난 것인지 모르겠다. 정말 고치지 못하겠다. 내가 그래도 나름대로 학창 시절 때는 공학으로 상도 타고 그랬는데... 짜증 난다! 돌을 집어던졌다. 멀리도 날아간다. 이오는 중력이 달과 비슷하니, 그럴 것이다. 은근 재미났다. 돌을 몇 개 더 던졌다. 조금은 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주먹 정도 크기의 돌을 내리꽂아서 던졌다. 아니 근데 바닥에 돌이 부딪치면서, 돌이 깨졌고, 그중 한 조각이 우주선 쪽으로 날아갔다! 오 하느님... 여기서 더 고장 내면...

근데 그 통신 모듈이라는 상자에 닿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천만다행이었다. 설마 손상된 곳이 없는지 염려되어 가까이 다가가 먼지를 닦아보았는데, 불이 꺼져있는 LED가 있었고, 옆에는 Main Power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렇다. 나는 콘센트가 꽂히지 않은 전자기기에 힘을 쓰던 중이었다. 허탈했다. 전원 케이블이 끊어진 것이었다. NASA는 이런 상황을 대비해 케이블 모양을 통일해 놓았다. 여분 케이블을 찾지 못해 전등에서 하나를 떼 연결했다. 제발 NASA, 이 일기를 본다면 비상용품 좀 찾기 쉽게 두세요.

2016년 8월 23일 — 4일차

희소식이다! 통신 장치가 복구되었다. 감격스러워서 어제는 바로 잤다. 주변 주파수를 잡아 통신을 연결하는 데 4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이다. 일어났을 때는 곧 다른 우주선이 날아와 나를 구할 것이라는 생각에, 살아 나갈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 들떠있었다. 구조 신호 통신 기록을 확인했다.

[MainCom 20160822 23:44] Contact Failure. Refinding...
[MainCom 20160822 23:48] MotherShip Found. Refinding…
[MainCom 20160822 23:56] No Other Starship Found Nearby. 356 attempts to find a Starship.

없다. 난 또 혼자다.

[MainCom 20160823 02:33] Refugee Found.
[MainCom 20160823 02:41] 3 Refugees Found. Distance: Approx 3600km, 5400km, 6400km.

그래도 다른 탈출자 신호는 잡히기 시작했다. 4배 더 많은 사람은 4배 더 강한 신호를 만들고, 4배 더 높은 구조 확률을 만든다. 이오에는 전리층이 없어 탈출선들 간의 통신은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어디인가?

라디오로 방송되는 긴급 방송은 없었다.

2016년 8월 24일 — 5일차

오늘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이 탈출선은 연료를 최대한 아끼도록 설계되어 있기에, 탈출 이후에 많은 연료를 쓰지 않았다. 또 탈출선에는 최소 2번 달을 탈출할 수 있는 엔진의 연료가 있다. 이오의 중력은 달과 비슷한 수준이니, 여기서 탈출할 가능성이 없진 않아 보인다. 내 힘으로 이오를 탈출 가능한 것이다!

2016년 8월 24일 — 5일차

방금 전에 한 생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탈출한다 하더라도 도약 엔진이 없는 이상 5일 동안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멀지 않다. 사실 모선의 도약 엔진이 있다 하더라도 0.2AU를 겨우 갈까 말 까이다.

2016년 8월 24일 — 5일차

방금 애플파이, 즉 모선의 메인 컴퓨터와 교신에 성공했다. 모선에는 6.3AU 거리를 비행할 수 있는 연료가 있다. 모선의 앞 500m가량은 심각하게 파손되었다. 대부분의 시스템은 정상적으로 동작한다. 모선의 앞 부분에는 쓸 데 없는 연구 시설들이 있으니, 필수적인 부분은 아니다. 관리 계정을 탈취해 우주선의 앞 부분을 분리하면 된다.

그러다가 생각을 또 말았다. 엄밀하게 이 모선은 NASA와 항공사의 소유물이므로 나는 엄청난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다른 모선이 수거해가면 내가 희생할 실험실의 일부를 복구할 수 있다. 가격은 천문학적 단위이다. 이런 책임을 전혀 지지 않을 완벽한 계획, 즉 구조 요청이 있는데 뭐 하러 이런 행동을 할까? 일단 플랜 B로 남기기로 했다. 이 방법이 위험부담이 너무 큰 것도 있다.

2016년 8월 24일 — 5일차

일단 구조 신호는 지속적으로 송신되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연락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참 착잡하지만, 그동안 할 수 있는 일은 생존 매뉴얼을 반복해서 읽거나 플랜 B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차피 탈출선 안에 있는 한 5일은 꽤나 안전하게 살 수 있다. 다른 우주선들도 구조 준비 작업을 하려면 하루 정도는 필요하다. 아니면 내가 이 행성에서 먼저 나가는 방법도 있겠다. 내가 이 안에서 살 수 있는 것은 길어야 일주일이다. 그 이상 되면 위험해진다.

오늘부터 활동량을 줄이고 수면 시간을 최대한 늘리기로 했다. 하루에 두 끼를 먹으면 2일 치 식량으로 3일을 살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은 5일 치 식량으로 7일 정도를 살 수 있다. 중간중간 몇 끼를 굶게 된다면 며칠을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15일을 넘기지는 못할 것이다. 애초에 이 항공사가 10일 치 식량만 넣어놓은 이유도 구조 작업이 빠르게 진행된다는 것의 홍보 전략인데, 순 엉터리다. 아마 내 탈출 선의 신호에도, 대형 모선의 구조 신호에 대한 응답이 없다는 것은 기업이 통신을 차단한다는 의미도 된다. 아마 지금 사고가 난 것을 덮기 급급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사고가 난 모선에 대한 긴급 뉴스가 나오지 않는 것도 설명이 된다. 살아나가 더 이상 다른 희생자들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 이유가 한가지 더 생겼다.

2016년 8월 26일 — 7일차

어제는 하루를 꼬박 잤다. 일어나자마자 허기가 져서 아침을 (이곳에서의 하루는 내 수면을 기준으로 넘어간다고 정했다) 먹었다. 아침 식사를 하며 각종 브리핑을 들었는데, 안 좋은 소식이 있다. 모선의 가속도계에서 힘이 감지되고 있다. 목성의 중력인 것 같다. 만약 너무 늦는다면, 애플파이를 타고 탈출할 충분한 시간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플랜 B의 희망인 애플파이가 사라진다. 플랜 B의 필요성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한다.

2016년 8월 27일 — 8일차

오늘도 아무 연락도 없고, 아무 뉴스도 없다. 모선에서는 한 통의 알림이 왔다.

[MainCom 20160827 04:32] Status: Drifting / Being Affected by Gravitational Field

정말 자유낙하를 시작 중이라는 것이다. 심각하게 고민이 된다. 여기서 애플파이를 타고 탈출한다면 목성에 떨어질 애꿎은 우주선을 구하는 셈이기도 하다. 연구실을 버린다 하더라도 항공사는 덜 손해 보는 것이다.

이제 모선을 탈취하면 안 되는 이유가 위험성 뿐이다. 근데 지금 상황을 보니, 내가 구조되지 못할 확률이나 모선을 조종하다 죽을 확률이나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2016년 8월 27일 — 8일차

안 되겠다. 나는 모선으로 간다. 그나마 살 확률이 높아 보인다.

결정을 했는데 막상 가는 방법을 모르겠다. 항법 장치의 목적지는 이오 위성으로 설정되어 있다. 설정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관리자 계정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이 우주선을 '해킹'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해킹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 우주선은 탈출선이지, 공군 군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단 해킹을 하려면 통신을 차단해야 한다. 우주선에는 기본적으로 중요한 설정이 변경될 때 통신을 차단하고 진행해야 한다. 그래야 우주선이 설정이 바뀌면서 악성코드에 감염되더라도 다른 우주선에게 감염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지금은 악성코드는 무슨 감기 바이러스에도 감염되지 않는 곳에 와 있다.

2016년 8월 27일 — 8일차

방금 통신장치를 껐다. 애플파이 모선과의 통신도 불가능해진 것이다. 관리자 계정으로 로그인하기 위해서는 해당 암호가 필요하다. 암호는 지문을 '촬영'하는 방식의 지문인식이었다!

생필품 중에서는 만능 테이프와 연필이 포함되어 있다. 이 테이프와 연필로, 지문을 복사하면 될 것 같다. 이 탈출선 내의 수많은 지문 중에서 관리자의 지문을 찾아야 한다. 관리자, 즉 함장만 만질 법한 장소가 어디 있을까?

관리자가 만질 만한 장소. 관리자만 만질 만한 장소. 2가지 경우가 있다. 정말 중요한 부분이라 관리자만 허락되는 장소이거나, 너무 의미 없거나 다른 사람이 만질 필요가 없는 개인 소장 물이다.

아, 이 탈출선에는 관리자에게 운용 허가를 받은 허가증이 있다. 아마 그곳에 있을 수도 있다.

2016년 8월 27일 — 8일차

됐다! 성공이다. 탈출선의 허가증에서 직인 주변의 지문을 채취하니 3번 정도 실패했다. 그러다 생각을 바꾸어 종이의 뒤에서 지문을 채취했는데, 잠금이 해제되었다! 아마 손으로 종이를 잡을 때 네 손가락 중 하나가 인식된 것 같다. 드디어 모선으로 귀환하도록 항로를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탈출선이 운행을 시작할 때는 원칙적으로 탑승자가 수면 상태인 채로 시작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2016년 8월 28일 — 9일차

역추진이 가동된 지 4시간 정도 지났다. 위성을 벗어날 때 다소 많은 진동이 있었지만, 곧 조용해졌다. 정말 아무 소리 없이 조용해졌다. 이제는 모선이 내뿜는 신호를 따라 천천히 이동 중이다. 관리자 계정이 있으므로 속도 잠금을 해제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2016년 8월 28일 — 9일차

7시간째 비행 중이다. 모선의 정확한 위치 추적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근접하면 (사실은 그리 좋은 신호는 아닌) 충돌 주의보가 울리고, 그럼에도 뭔가 불안해서 자꾸 창밖을 내다보는 중이다.

식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

2016년 8월 28일 — 9일차

시야에 애플파이가 들어왔다. 자세하게 보았을 때 찢어진 함선의 내부가 보였다. 도킹은 자동적으로 진행될 것 같다. 나는 찢어져서 공기가 빠져나간 모듈에 도킹하는 것이므로 아마 내부에 선외 우주복을 입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2016년 8월 29일 — 10일차

도킹이 끝나고 선외우주복을 입고 내부로 들어갔다.

2016년 8월 29일 — 10일차

내부 구조를 알고 있었기에 관제실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관제실로 가는 도중 에어록이 있었는데, 공기 유출을 방지하는 용도다. 에어록부터는 선외우주복을 벗고 들어갔다.

관제실에 도착해서 챙겨온 지문 샘플로 인증을 했다. 문제는, 로그인된 계정이 엔지니어 직급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제 정말 애플파이의 관리자인 함장의 지문을 찾아야 한다.

전에 탈출선에서도 함장의 개인 소장품을 찾는다는 생각을 했기에, 바로 함장의 객실로 향했다. 객실에 들어가기 위해, 메이드룸에서 청소부의 카드를 한 장 훔쳤다. 메이드의 카드를 쓰는데도 문은 열리지 않았고, 계속 '접근 불가'라는 안내 메시지만 나왔다.

그러다 생각을 바꾸어, 일등항해사도 애플파이의 시동 권한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등항해사의 방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일등항해사의 방에는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열렸다!

일등 항해사의 방에서 지문을 찾아보았다. 가장 지문이 많이 선명하게 찍혀있을 물건을 찾으러 서랍을 뒤졌다. 일등항해사와 많이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쪽 계열에서는 유례없는 젊은 나이에 엄청난 초고속 승진을 하신 분이라고 들었다. 좀 많이 죄송했지만, 어쩌나. 나는 살아야 한다. 아마 항해사님도 이해하실거다.

서랍을 뒤지다가 일기를 발견했다. 일기를 절대 고의로 읽으려는 것은 아니었고, 지문을 채취하기 위함이었다. 정말이다!

그런데 일기장의 내용에는 심히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

일등 항해사의 일기장

02 / 29 / 16

오늘 처음으로 장거리 도약을 한다! 설레서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아마 오늘 잠들면 한 달 있다가 깰 것 같다! 무슨 꿈을 꿀지 궁금하다. 악몽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중략)…

05 / 05 / 16

오늘은 어린이날 기념행사로 선내의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었다. 너무 귀여운 아이들이다.

05 / 08 / 16

오늘 아침 통계를 살펴보니, 예상외로 속도가 많이 느리다. 출력을 높이는 중인데도 속도가 나질 않는다. 함장께 보고하니, 시스템 오류일 것이라고 한다. 함장은 차라리 속도를 더 높이라고 지시하셨다. 아무리 봐도 수상하다. 추진기 출력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해 보았는데, 그런 것은 아니었다.

06 / 06 / 16

오늘은 현충일이다. 이 우주선은 아직 무사고 운행 중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 근처에서 희생되었을 것이다. 기도를 드리기 위해 선내 창고를 다녀오는데, 이상한 기록을 발견했다.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알게 된 것인데, 컨테이너 48번의 크기가 좀 커서 기록을 확인해 보니 빠져있는 것이다. 아마 기록에서 유실된 것 같아 채워 넣었다.

06 / 07 / 16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큰 수하물이 기록에서 빠졌다는 것은 이상했다. 그래서 오늘은 모든 짐과 수하물의 목록을 확인했다. 충격적인 것을 알게 되었다. 컨테이너 48번을 비롯해 총 29개의 컨테이너가 목록에서 빠져있었다. 여기서 컨테이너는 작은 컨테이너가 아니라, 가로 20미터, 높이 20미터, 길이 100미터 정도 되는 수송용 컨테이너다. 하나에 최소 10kt이 들어가니, 그렇다면 무게는 아무리 못해도 290kt이다. 내일 함장님께 여쭤볼 것이다.

06 / 08 /16

함장님은 망설이시더니 말씀해 주셨다. 현재 항공사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다고, 이렇게라도 돈을 아껴야 한다고 하셨다. 항해법상 과다 적재는 엄연한 불법이다. 게다가 도약 중이라면 더 그렇다. 수하물의 결박이 풀리기라도 하면 우주선의 안쪽부터 망가진다. 함장님은 이번 일이 잘 끝나면 한몫 챙겨 줄 거라고 하시며, 이 일을 발설하면 나도 수하물 과다 적재에 동의한 채 우주선을 운행한 것이라고 했다. 말도 안 된다. 그래도 내가 만들어온 경력과 이미지가 위험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일단 목적지까지 예상 시간 내에 도착해야 하고, 그렇다고 짐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까지 꽤 느린 속도로 왔으니, 권장 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도약해야 한다. 도약 엔진에 무리가 갈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딱히 방법이 없다.

06 / 23 / 16

도약 엔진에 문제가 생겼다. 그러니까, 지금은 가속하진 못하고 등속 직선 운동하는 상태인 것이다. 빨리 고쳐야 하는데, 안 그러면 더 빠른 속도로 가야 한다.

07 / 17 / 16

오늘은 제헌절이다! 곧 목성 일대를 지나게 된다. 목성의 중력을 이용하는 '스윙 바이' 항법을 이용할 것이다. 목성 주변에는 트로이안 소행성대가 있는데, 곧 그 일대를 지나게 된다. 지금 권장 속도보다 훨씬 빠른 상태로 도약 중이라, 소행성을 미리 탐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앙 전력 중 일부를 전면부 레이더와 측면부 레이더로 돌려, 훨씬 민감하게 탐지하도록 했다.

이번 과다 적재는 내 잘못도 있다. 미리 알게 되지 못한 점도 있다. 이번에는 방법이 없다. 착륙한 뒤 조용히 한다면 넘어갈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게 올바른 것인지 회의감이 든다. 굳이 언론에 알려도 과다 적재로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껏해야 함장이 벌금형을 받을 것이다.

08 / 18 / 16

오늘은 선내에서 파티가 있었다. 함장은 술에 엄청 취한 상태였다. 솔직히 함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분위기가 한창 후끈할 때, 한 스위트룸 고객이 우주선 속도가 너무 느린 것 아니냐고 소리쳤고, 다른 고객들도 (아니, 사실 취객들이다) 소리쳤다. 함장은 우쭐했던지 속력을 더 올리라고 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말렸다. 지금 권장 속력의 3배 이상으로 달리고 있는데, 더 올리면 안 된다고 했다. 함장은 가소롭다는 듯이 손으로 5자를 만들었다. 미치겠다. 그러고는 머리를 갖다 대라고 하며,

"잘리고 싶어,,,,,쉬벌,,? 마,, 내가,,, 우주선을 운행한게,, 30년이,,,,,넘었어,,,,개셰덜,,,,,,우리 때는,,,,그냥 가만히 있었어,,,,요즘것들,,,,맘에,,,안들어,,,,"

짜증 났다. 진저리가 난다. 일단 5배속으로 올렸다. 함장이 "진즉 그럴 것이지" 하며 술을 마저 마셨다. 난 일단 명령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탈출선에 연료와 식량 보급을 시작하라고 했다. 탈출선 연료와 식량 보급은 빠르게 진행되어야 해서, 3시간 안에 탈출 준비가 끝날 것이다.

08 / 19 / 16 (일기장 음성 기록)

오전에 경보가 났다..! 소행성이 감지된 것이다….. 헉…헉… 중앙 동력이 엔진으로 무리해서 이동했기에, 보조 레이더가 전부 꺼.. 졌었다… 휴…! 충돌까지 17분… 남았을 때 첫 경보가 울렸었다! 워낙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이어서 막지는 못했..었다. 방향 전환을 하려면 최소 8도를 돌아야.. 했는데, 그럴 시간이 전혀 없었다… 무능한 함장이라는 작자는… 지금 개인 고속정을 타고.. 도망.. 쳤다… 지금은 모든 객실의 사람들을 강제 수면 상태로.. 돌리고… 탈출 순으로 옮기고 있.. 다..! 아니.. 지쳐서 말이 헛.. 나 왔다.. 나는 지금 우주선이 목성 궤도를 돌도록 설정 중이고… 탈출성에 프로그램을 입력 중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조될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래야.. 한다! 탈출 선들여 분리되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어서 빠져나가야겠다!

그렇다.

너무 충격적이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1등 항해사의 지문을 채취해야 한다!

2016년 8월 30일 — 11일차

접근은 성공했다. 이제 내가 이 우주선의 함장이다. 안타까운 소식이 있는데, 나와 있던 다른 세 정의 탈출선이 잡히는데, 내부의 생체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선외 활동 중 상태도 아니다.

2016년 8월 30일 — 11일차

앞 부분의 실험실 부분을 떼어내고 운행을 시작했다. 목성의 궤도를 돌고 있으므로, 목성을 빠져나와야 한다. 아마 많은 연료가 들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함선에 나 혼자 있다는 것이 매우 무섭다.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다.

한편,

08 / 20 / 16

나는… 탈출선을 타고 탈출했다. 아, 직함은 일등항해사이다. 함장과 연락이 되는 상태이다. 함장의 뻔뻔스러운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함장은 자신은 고속정을 탄 상태라 충분히 혼자서도 도약이 가능하다고 했다. 수면 상태로 간다면 10개월 안에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모선의 구조 신호증폭기를 원격으로 껐다. 복구하려면 다시 우주선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 함장이라는 그 사람은 천벌을 받아야 한다. 너무 화가 나서 다음에 기록하겠다.

08 / 31 / 16

우주선에서 강제 귀환 신호가 나면서 나를 수면에서 깨웠다. 거의 냉동인간 상태로 수면 중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

2016년 8월 30일 — 11일차

17시간의 사투 끝에 목성의 중력에서 벗어났다! 아니, 곧 벗어날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설정을 잘못 건드렸는지, 갑자기 중앙 알림 센터에 수백 개의 알림이 떴다.

[Maincom: 20160830 21:22] From Escape Pod 172: Emergency: Vital signal critical
[Maincom: 20160830 21:23] From Escape Pod 473: Emergency: Vital signal critical
[Maincom: 20160830 21:23] From Escape Pod 583: Emergency: Vital signal critical
[Maincom: 20160830 21:23] From Escape Pod 032: Emergency: Vital signal critical

수백 명의 사람이다.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아마 나도 이런 짓을 생각하지 못했다면 운명을 함께했을 것이다.

2016년 8월 31일 — 11일차

다행인 것은 아직 절반 정도의 탈출선 내에 사람들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대대적으로 방송을 했다. 우주선을 복구했으니 귀환하라고. 지구로 함장에 대한 서신을 보냈다. 함장이 도착해서 깨어났을 즘이면 아마 경찰이 대기 중 일 것이다! 그 사람은 일등항해사의 말처럼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연락 가능한 모든 우주선에서 귀환을 시작했다는 알림이 왔다. 곧 사람들이 도착할 것이다.

너무 기쁘다.

2016년 9월 1일 — 며칠 차인지 셀 필요가 없는 날.

사람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너무 감격스러웠다. 일등항해사도 곧 도착하셨다. 사람들이 모두 모이고, 일등항해사, 아니 이제 함장님이 지구로의 항로 설정을 마쳤다는 말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다! 곧이어 파티를 진행했다. 정말이지 성대한 잔치였다!

아, 술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