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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식민지 근대성

특히 한국의 학자들 중에는 근대성을 식민지적 맥락에서 연구하기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 근대성은 역사적 진보를 의미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식민주의와 같은 퇴행적 현상과 절대로 연관될 수 없다. 즉, 식민주의는 '진정한 근대성의 건설을 방해하거나 기껏해야 '왜곡된 발전'만을 낳을 뿐이라고 본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사회 변동의 행위자로서 식민지 국가는 '근대적인 것' 자체의 정당성을 빼앗는다. 그러나 이는 가치 평가적이고 본질주의적인 개념 사용이다. 왜냐하면 근대성은 보편적 경로도 아니고 역사적 필연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대성 이해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들이 그들 자신의 근대성을 구성한 행위자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식민주의는 한국이 근대로 나아가는 길에 개입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들이 근대성을 그저 수동적으로만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민족주의로도 식민주의로도 구한말 조선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재적 근대화론을 따르면 첫 시장경제가 등장하고 수백년이 지났음에도 병약했던 조선의 위생과 퇴폐적 행정을 설명하기 어렵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따르면 1880년대에 개화파들에 의해 600개 이상의 근대 법령이 제정되었으며 그 체계들을 일제가 손봐서 운영한 점에서 일제의 식민지 경영이 여타 열강들의 식민지 경영과 달랐다는 점을 간과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편리한 민족주의를 택한다. 천편일률적 선악구도를 인위적으로 구축하여 그 프레임을 소화함으로써 우리의 전근대적 유아적 콤플렉스를 방관한다. 때문에 이러한 민족주의는 자본주의맹아론이라는 이름 아래 일제의 폭압적 정치로 인한 한국 사회 경제의 파괴만을 조명한 채 동시에 그로 인해 한국인이 스스로 구축한 독립적 근대성을 스스로 타자화하며 한국의 근대화 담론에서 자신들을 제외하고 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식민주의와 민족주의는 톱니바퀴처럼 연동되어 있다. 식민지 사회에서 민족이 전혀 주도성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노예처럼 끌려간 것이 아니라, 식민지 사회 안에서도 민족주의적인 근대화가 역동적으로 일어났으며, 식민주의는 이런 역동의 억제를 해제하는 사회적 역학구도를 창조한 것이다. 즉, 근대화는 필연도 아니고 보편적 경로도 아니며 진보의 산물도 아니다. 단순하게 제기되는 일차원적 역사 경로로는 그 시대를 꾸준히 살아간 민족의 노력을 폄훼하는 것이자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식민주의가 근대화를 불러온 만큼 민족주의도 근대화를 불러오고 있었고, 식민주의가 역사관을 파괴하고 있는 만큼 민족주의도 역사를 파괴하고 있다.

민족주의와 역사 서술의 문제점

  • 20세기의 민족주의는 강력한 동원력을 가졌으나, 그것이 반드시 역사적 정확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은 특정한 민족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중요한 요소나 다양성을 간과하게 만든다.
  • 민족적 정체성은 과거의 연속성과 현재의 상황에 따라 형성되며, 이것은 민족의 진화나 변화보다는 특정 시기의 연결성을 강조한다.
  • 현대 한국의 민족사학은 일관된 민족적 역사를 강조하며, 고대의 각 국가들을 모두 한 민족의 일부로 본다.
  • 현대 한국의 민족사학은 민족을 위해 자신만만하게도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민족적" 영웅들과 을지문덕 같은 군사적 영웅들의 길다란 목록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존 던컨(John Duncan)이 지적하듯이, "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들 모두가 자신들을 지역적 경계와 국가적 충성을 초월해서 보다 거대한 한국인 집단의 일원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신채호

신채호의 중립성

신채호는 일본이 "동양 평화 한국 독립"을 보장하는 조약을 통해 한국을 배신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문화운동'을 추구하는 민족주의자들이 식민당국에 굴복하며 연극이나 장르만을 중요시하는 것을 비웃었다. 신채호는 진정한 국민의식 깨우침을 위해선 폭동의 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외교론'과 '준비론'을 주창하는 민족주의자들, 특히 이승만과 안창호를 비판하였다. 이승만은 외세에 의존하며, 안창호와 같은 준비론자들은 독립을 위한 준비를 주장하며 다양한 나라에 자금을 모으러 다녔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신채호와 아나키즘

신채호는 민중이 평등, 협동, 이성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식민지 지배 및 특권계급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고 봤다. 그는 이러한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더 광범위한 정치적 프로그램을 주장했고, 건설과 파괴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본질적으로 파괴는 건설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전쟁 후의 국가 민족주의는 신채호의 독립적인 생각을 억압했으며, 그의 아나키즘 전환은 민족 자체가 민주적 방향으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채호와 첫 코리안 르네상스

신채호가 국가의 역사를 민족사로 규정한 것은 프랑스 혁명기에 일어난 혁명적 변화('국왕이 곧 국가다'에서 '국가는 곧 국민이다'로의 변화)에 필적한 것이다. 「독사신론」의 첫 문장은 신채호와 그 당시 지도적인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공화주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 글 후반부에서 신채호는 "국가는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고 모든 이들의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전술적 측면에서 신채호는 한국의 군주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사신론」에서 나타난 민족주의적 입장은, 강만길이 기술한 대로 왕에 대한 충성을 바탕으로 한 애국심으로부터 인민 주권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 같은 민주적 성향은 신채호의 이후 저작에서 훨씬 더 명백해졌다.

안드레 슈미트가 지적했듯이, 신채호가 단군으로부터 기원하여 부여를 통해 계승된 한국민의 독특하고 독자적인 종족성을 주장했을 때 그의 목적은 한국의 민족적 공간에 대한 나약하고 제한된 관념을 뒤엎으려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중요한 점은, 신채호의 『독사신론』이 나오기 20년 전에 일본인 역사가들이 일본의 '협소한 민족적 공간' 개념을 문제 삼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1889년에 발행된 논문에서 쿠메 쿠니다케는 "일본을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은 섬나라로 인식하는 것을 비판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한국과 중국 남동부를 포함했던 고대 일본을 상기하게 하였다. 결국 스테판 다나카가 지적하듯이, "쿠메와 같은 주장이 한국의 합병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좀 더 거대한 일본에 대한 공간적 상상과 좀 더 거대한 한국에 대한 신채호의 상상은 비슷한 전략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정치적 목적은 정반대였다. 쿠메는 일본 식민주의를 위한 역사적인 틀을, 신채호는 한국인의 저항을 위한 역사적 틀을 짜는 것이었다.

신채호는 이러한 방어적 동기에서 한국 민족에 단군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고 남방 계통에 대한 북방 계통의 우월성을 강조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만주를 민족의 탄생지이자 과거 한국의 영광을 강력히 자극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신채호가 만주를 전유한 것이 방어적 반응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역사 서술은 강력한 전체화 경향을 지지하고 배가시키기도 하였다. 전체화하는 담론으로서의 '민족'에 대한 논의에서 이 문제를 상세히 살펴봐야 한다.

이광수

  • 민족주의에 대한 공격이 오히려 민족주의를 더 강화시킬 수 있다.
  • '내면'은 변하지 않는 본질로서의 정체성을 의미하며, 이는 영혼, 상상, 정서 등에 연결되어 있다.
  • 이광수는 문명과 문화를 구분하였으며, 그의 저술은 그 차이를 반영한다.
  • 이광수는 조선에 대한 사랑과 애국정신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며, 그는 그의 글쓰기를 통해 그 감정을 공유한다.
  • 이광수는 민족의 경계와 중심 사이의 반복적인 움직임에서 그의 존재와 글쓰기를 반영하였다.
  • 내면의 발견은 식민지 기간 동안 일본의 헤게모니에 대한 반응으로, 이광수의 작품에서는 조선의 독립적인 내면을 탐구한다.
  • 1920년대에 '민족'이란 용어는 조선인의 본질로 인식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문학을 통해 강조되었다.
  • 이광수는 민족의 변천과 발전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였으며, 민족의 진화와 경쟁에 대한 개념은 20세기 초의 동아시아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 "이광수를 "추방하려는"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계속해서 민족의 경계에 출몰한다. 그는 때때로 민족의 중심부에 소환되고 등장하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추방되고 마는데, 이것이 민족을 배반한 모든 이의 운명이다."

농민 = 한국인?

20세기 초 한국에서는 '농민'이라는 개념이 서구식 사회계급 모델을 통해 새롭게 해석되었다. 이성환과 이돈화는 한국의 문제 해결을 위해 농민을 사회의 주체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은 농민이 한국의 부를 대부분 생산하기 때문과 모든 한국인이 동일한 종족 집단이기 때문이다. 농민들 사이의 계급 구분과 관련된 용어와 개념들이 식민지 시대에 도입되었으며, 이는 한국 농민들의 생활과 관련된 특별한 맥락에서 발생한 것이다. 도시의 성격이 진보적이고 외국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반면, 농촌은 한국의 정체성과 연결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농민문학에서도 이러한 관점이 반영되었다. 예를 들어, 이광수의 소설 "흙"은 농촌과 도시, 전통과 근대성 사이의 갈등을 주제로 다루었다. 한국의 식민지 역사는 농민과 근대성, 그리고 민족 정체성 사이의 관계를 재평가하게 만들었다. 현재 한국은 주로 도시화된 국가이지만, 농촌과 한국의 정체성 사이의 연결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

한글

한국인의 정체성 담론은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과 일본의 식민 지배 양쪽에서 발전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 담론은 전 지구적인 민족국가 체제 발전과 연결되어,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한국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주제에 대한 연구와 표준화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언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으며,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은 1894년에 국문의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양반들은 훈민정음을 비속한 문자로 여겼다. 1894년에 훈민정음이 국문의 지위를 얻은 후에 한문은 중국 것으로 간주되어 폐기되었으나, 1910년 일본의 합병 후에는 한국의 국어와 국문이 일본어로 바뀌었다.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후에 한국 고유 문자 체계의 명칭 을 한글로 변경했는데, 그것은 일본 문자와 구별하고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19세기 후반에 갑작스레 언문이 존중되었다는 것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붕괴되면서 지식의 인종화(racialization)가 진행되었다는 증거이다.

기타

  • 감옥은 현대인들에게나 효과 있는 것. 과거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관념이 없었다. 때문에 시간에 대한 감각이 무뎠고, 덕분에 감옥이 효과적인 통제 수단이 아니었다.
  • 쌀을 증산해봐야 조선인은 좁쌀과 겨를 먹었다.
  • 라디오가 늘어나며 문화적 배출구가 등장.
  • 전신은 제국의 신경, 통제력 강화를 위해 사용.
  • 전신은 억압 도구인 동시에 개발 도구였다. 양자 모두 향상된 통신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일본인들과 재한 일본인들과도 갈등이 컸다.
  • 한국의 근대화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 주권의 상실은 민족의 정체성을 약화시킨다.
  • 식민지 권력은 자신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 교육과 근대적 기관을 통제하며, 그 결과로 근대성이 식민지적 특성과 얽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