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고
한줄평
민사고에 대한 한줄평을 내리자면,
한민족의 모든 욕망을 충실하게 형체화한 모습. 그 장점과 단점을 한 곳에 정제한 모습.
라고 할 수 있겠다. 한민족의 영리함을 뜨문뜨문 가지고 있지만, 한민족이 오랫동안 버리지 못하는 후진성과 폐단, 그리고 논란이 있을 때마다 재빠르게 멍석말이 하는 모습, 냄비처럼 쉽게 달아올랐다가 금방 꺼지는 모습, 무엇이 어떻게 되었든 결과가 잘 나오면 외면하는 모습, 그럼에도 독창적인 찬란한 문화가 어찌저찌 만들어졌고, 그걸 의도치 않게 유지했고, 그게 외부에 상품화된 것까지...
학연
우선 압도적으로 밀집도가 높은 학연 사회이다. 나는 오히려 대학보다 더 밀집도가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에서는 학과 단위로 어울리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단순히 '동문이다' 정도만 존재한다. 민사고는 반대로, 선배들 얘기 들어보면, 기숙사 옆 방이 지금 어디 대표고, 어디 교수고, 검사, 의사고... 그마저도 분야가 잘 안 겹친다. 그래서 어디 각계각층이든 지도자 혹은 권한 있는 누군가를 정말 알고 지내는 사회다. 한국 학연 사회의 정점이다.
폐교?
그에 반해, 나는 현재의 민사고는 폐교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여전히 유지한다. 자유냐 평등이냐 그런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단순히 너무 비합리적인 형태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악습과 폐단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학교가 일을 제대로 하지도 않아 대부분의 일은 학생들이 도맡아 하며 인사 발령은 철저히 교내 정치 유착에 의해서 일어나고 학생들의 권리는 안중에도 없다. 대다수 대학보다 많은 학비를 받아가며 무너져가는 건물 겨우 보수만 하는 중이다. 대부분의 교육 과정이 그렇다고 특출나지도 않은 채로 완장 놀이만 하는 작태가 단순히 너무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대다수가 논하고 있는 '엘리트교육'의 옳고 그름을 논할 필요도 없이,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면벌부를 받은 양 현재의 구태적 부실 경영을 지속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속세의 환멸을 주로 느꼈다. 나는 학교의 그 소사회 속에서 딱히 좋은 기억이 막 나지는 않는다. 단순하게 모두가 친구를 할 수 있는 그런 사회는 아니었고, 모두가 제 나름대로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셈하는 사회였다. 좋은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 빡빡한 눈치 보는 강압적인 사회 속 그때 한켠에 항상 느끼고 살던 불편함 또한 기억난다. 개인이 숨쉴 공간이 없었으며 사생활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기숙사 특유의 드센 '남성적' 집단주의 문화도 존재했다. 그런 사람들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분위기를 상당수 조성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악습
거기에다가 얼마나 관습적이고 후진적인 문화 또한 오랫동안 보존되었는지도 기억난다. 폐단 하나를 없애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지. 그리고 누군가 주먹구구식으로 정한 무언가가 단순히 '그래왔다'는 명목 아래 얼마나 오랫동안 보존되고 유지되었는지 세상의 이중성 또한 느껴졌다.
지금의 우리가 곧 후손의 전통을 만드는 것이므로 얼마나 기민하게 후손을 위해 모범적 선례를 구축해야하는지 중요성을 배웠다.
踏雪野中去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가는 이여
不須胡亂行 발걸음을 어지러이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遂作後人程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이양연
교육
사실 민사고에서는 민족 주체성 교육을 한다고 하지만 딱히 특별하게 학교 차원에서 역사관이나 민족의식에 대해서 배운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민사고라는 공간이 입시 레이스에서 벗어나 그 입시적 진공을 만들었다는 데에서 의미를 찾는다. 학원을 다닐 수도 없고, 입시 준비를 빡세게 할 수도 없으며, 시험은 죄다 대학 시험처럼 전체 서술형이니 준비할 수도 없고,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도 대학 1-2학년 내용을 가져다가 변형한 내용들이니 당최 개인이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렇다고 평소에도 풀 레이스로 온전하게 공부만 하겠는가. 그러다보니 평소 많은 시간이 큰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 '진공' 상태로 유지되었다. 살인적인 한국의 입시 경쟁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그런 '안전 공간'을 제공해줬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을 뿐, 민사고의 교육 과정이 특별히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냥 체계적이지 못한 대학 교양 수업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