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영광 (16誠鉉-18誠鉉)
그러니까, 대충 중학교 때까지는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었다. 적당히 똘똘하고 범생이인 성적 좋은 애였으니까. 하지만 여느 사다리가 그렇듯이, 민사고에 진학하면서 나는 별볼일 없는 또래1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주는 상실감과 소외감과 괴로움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훗날 먼 미래에 알게 된 것이었지만... 나를 더 강하게 믿어주지 못한 것에 후회가 된다. 특히나 기숙사 생활 특유의 드센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나를 무시했어서 한켠으로는 지레 겁먹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1984에 나오는 이중사고(Doublethink)를 한 느낌이다. 저 아래 잠재의식 아래로 "나는 중하위권이야"라는 이미지에 나를 그냥 맞춰버리고 자포자기한 상태면서, 동시에 의식 위로는 왜 나는 더 잘하지 못할까에 대한 끊임없는 괴로움을 느낀 것이다. 그러다 나중에 수학의 신으로 이미지메이킹한 학생이 AMC 12에서 84점 밖에 못 맞은 것을 우연히 알게된 뒤 (난 수학의 신은 아니었지만 97.5점 맞았다.) 모든 것이 이미지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여하튼 수출주도형 자존감 경제에서 내수중심형 자존감 경제로의 전환에는 수많은 고통과 역경이 있었다. 르네상스를 공부 하며 비슷하게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2016년 5월 31일
그때 써놓은 수많은 글들이 있지만 그 중 하나만 남겨본다. 나 혼자만 사용하는 여러 은어를 풀어서 써본다.
학교 생활에 만족하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설은 좋다. 신식학교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좋다. 일반고등학교에 비해 자유시간도 많고, 독자적인 교육과정이 있기에 오는 장점도 있다. 문제는 이거다: 여기서는 커다란 사회적 보상을 얻을 수 없다. 중학교 때까지는 괜찮았었다. 나는 절대적으로 우수한 편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교과 과목은 물론 대인관계 및 결과물을 뽑아내는 능력까지 뒤지지는 않았다. 소프트 스킬이 좋았기에 꽤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 중학교 3학년 여름 때부터는 학교의 중요 결정 사항에 선생님들께서 내 의견을 묻기도 하셨다. 실질적으로 꽤 많은 접근 권한이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작할 때부터 난기류가 너무 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내 스스로를 견고하게 믿을 수도 없었다. 나 스스로를 온전히 믿고 노력해보려 했지만, 다시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극심한 난기류를 만나고 있었기에 나 혼자 그렇게 믿고 싶은대로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민사고에는 '내미'라는 단어가 있다. '내신에 미친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는 과거 내미였다. 기억을 잘 짚지 못하는 것인지 적응하지 못하는 것인지, '그동안 이렇게 해오면 잘 됐는데... 왜 안되지?'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아니면 다른 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내 착각으로 눈감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부분적으로 이미 늦은 부분도 다분히 있다. 첫 기세에서 완전히 밀렸기 때문에 나는 이미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었다. 타성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은은하지만 강력하기에 지금 이렇게 자리잡아버린 생활 습관을 완전히 깨뜨리고 재정립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힘들고 바쁘고 괴롭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켠으로는 멈추지 말고 계속 나아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또 내가 쓰고도 어이없다. 이런 말은 형식적인 말이지 실질적인 도움이나 해결을 전혀 하지 않는다. 사실 그게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 지금 상황이 파악되지는 않지만 형식적인 말로 공포를 덮는 것 같기도 하다. 미래를 돌이켜봤을 때 오늘은 기념일일까? 아니면 추모일일까?